음식

[스크랩] 허시명의 우리 술 紀行 ③ : 약주

그린테트라 2008. 10. 3. 22:50
<월간중앙 2001년 06월호 >
 
한동안 잊어버렸던, <br>그러나 잊혀지지 않은 술맛
허시명의 우리 술 紀行 ③ : 약주
한동안 잊고 지냈던 술맛, 약주의 그 부드럽고 새콤달콤한 맛이 돌아왔다.
그 맛에 요즘 사람들이 매혹되고 있다. 새로운 전통주로 각광받는 약주가 지난 한세기 동안 겪었던 어두은 歷史
 

대학로의 한 한정식집에서 배상면주가의 ‘산사춘’을 시켰다. 새콤하고 달콤한데, 끈적거리지 않고 누룩내도 나지 않았다. 산사 열매와 산수유를 넣어 빚은 약주인데, 13도여서 반주(飯酒)로 마시면 좋을 만큼 맛있고 부드러운 술이었다. 화장품병처럼 생긴 반투명 술병을 들고 술맛을 품평하는데 마주앉은 이가 물었다.
“약주가 무슨 뜻입니까?”

그 질문을 받자 아차 싶었다. 내가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나 역시, 약주의 뜻을 몰라 사전을 뒤져 보고, 술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던 때가 엊그제였다.
약주는 우리 조상들이 즐겨 마시던 고급 술이다. 우리 술의 중심에 약주가 있었다. 현재 희석식 소주, 맥주, 양주가 삼각 편대를 형성하고 있다면 조선 시대까지는 약주, 탁주, 증류식 소주가 삼인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식민 지배를 당하고 전쟁을 겪고 군사정권을 거치는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술 취향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우리 술은 괴멸되고 외국 술이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술이면 그냥 취하면 되는 줄로만 알고 무작정 마셔 왔다. 지난날 찬란했던 약주의 시절이 있었던 줄도 모르고….

약주(藥酒)에는 세가지 뜻이 담겼다.
첫째, 쉽게 풀어 약술을 의미한다. 약재가 들어가 약효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약주는 술의 높임말로 쓰인다.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술을 들고 들어오셨을 때는 “약주 한잔하셨습니까?”하고 묻는 것이 예의다. 다짜고짜 술을 마시고 오셨냐고 묻지 않는다.
셋째, 약주는 청주(淸酒)다. 조선 시대에 한양을 중심으로 가장 보편적이고 공식적으로 쓰인 개념이다. 여기에는 좀 긴 사연이 담겨 있다.


약주의 뜻도 모르고

조선 중기 무렵이다. 서소문 밖 약현(藥峴) 동네에 서해(徐)라는 사람이 살았다. 본관은 달성이었는데 집안이 쟁쟁했다. 아버지 서고(徐固)는 충주 목사를 지냈고, 증조부 서거정(徐居正)은 대제학과 병조판서를 거쳐 종일품 좌찬성까지 지냈다. 서거정은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45년 동안 여섯 왕을 모셨는데, 시문(詩文)에 능했고 “필원잡기”를 지었으며 “동문선”을 편찬한 큰 학자이기도 했다.

서해는 유복하게 자랐고 성년이 되어 고성(固城) 이씨를 맞아 혼례를 치렀다. 그런데 신부가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였다. 서해는 충격을 받았지만, 이미 양가 부모가 응낙하고 첫날밤까지 치른 지라 내칠 수 없었다. 서해는 측은한 마음에 신부를 어여삐 어겼다. 하지만 그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 23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린 것이다. 그가 남긴 것은 눈먼 아내와 어린 아들 서성(徐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조참의를 지낸 아버지도 사절단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도중에 유명을 달리해 집안이 절단나고 말았다.

결국 모든 것은 눈먼 서해의 부인이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부인은 친정에서 얼마간의 돈을 빌려 청주(淸酒)를 빚고 찰밥과 유밀과(油密果)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 그는 정성껏 만들어, 맛좋기로 소문나 음식은 잘 팔려 나갔다. 그의 아들 서성도 어머니의 정성에 보답하듯 선조 19년(1586) 29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서성이 유명해지고 또 어머니의 음식 솜씨도 유명해져 어머니 이씨가 빚었던 청주는 약주(藥酒)로, 찰밥은 약밥으로, 유밀과는 약과(藥果)로 불리게 되었다. 서성의 동네는 약초를 많이 재배하던 약현(藥峴)이었고, 서성의 호가 약봉(藥峯)이었기 때문이다.

약봉 서성은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때 왕을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을 만큼 가까이에서 오래도록 왕을 모셨다. 벼슬도 병조판서와 종일품 숭록대부까지 올라 고조부인 서거정에 버금가는 영예를 누렸다. 그의 넷째 아들은 선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약주는 ‘약봉 집안에서 만든 술’ ‘약현에서 만든 술’이라는 뜻으로 청주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서성의 7세손인 실학자 서유구가 자기 집안에 이런 내막이 있다고 “임원경제지”(중국과 조선의 생물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집대성한 19세기 박물학서. 113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6개 분야로 나뉘어 있어 임원십육지라고도 부른다)에 밝혀 놓기도 했다.
이렇듯 분명한 유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현의 위치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약주의 고향 약현을 찾아갔다.


약주의 ‘고향’ 藥峴

약현은 서울 중구 중림동에 위치하고 있다. 중림동에 가 보니 약현이라는 지명은 약현성당에 ‘간신히’ 남아 있었다. 약현성당은 남대문 방향에서 염천교를 건너 서부역과 한국경제신문사로 갈라지는 삼거리를 내려다보고 자리잡고 있었다. 이 부근이 197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컸던 중앙시장(현재 약현성당 입구에서 한국경제신문사 앞쪽까지 형성된 해산물과 야채시장)인데, 상인들에게 약현이 어디냐고 물으니 약현성당을 가리킬 뿐이었다. 약현은 이미 성당의 다른 이름이 되어 있었고, 약재를 심었던 밭 한 뙈기 남아 있지 않았다.

약현성당으로 올라가니 1892년에 지었다는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물 옆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옛날 이곳에 약초밭이 많았으므로 약초밭이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약현’이라고 했다. 성당 사무실에 비치된 “약현성당백년사”(1891∼1991)에는 좀더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성당을 지을 무렵인 1891년의 일이다.

‘얼마전 우리는 남대문과 서대문 밖에 위치한 약현이라는 언덕에 땅을 사들여 성당과 사제단을 건립할 계획이었습니다. 그 주변의 땅 주인은 서상인(徐商人)이라고 불리는 현재 상중(喪中)인 양반입니다. 최근 그가 땅을 팔려고 내놓았기에 우리는 이미 돌과 기와 그리고 땅의 일부를 샀습니다. 집을 허무는 작업도 반쯤 진행되었고 구입한 건축자재도 이미 일부분은 배달되었습니다. 그런 시점에 갑자기 땅 주인의 친척들이 부당하게 반기를 들며 집을 허물 수 없다고 하면서 죄 없는 청부업자의 아버지를 형조에 가두게 했습니다.…’
성당 건립 과정에서 생긴 송사를 해결하려고 당시 뮈텔 주교가 프랑스 공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이 송사는 프랑스 공사의 노력으로 해결돼 이듬해인 1892년 조선 최초의 서양식 성당이 건립되었다.

천주교회에서 서상인에게 땅을 구입했던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까지 서성의 후손으로 보이는 달성 서씨들이 약현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금은 대대로 살아온 달성 서씨를 찾을 수 없었고, 약현의 위치마저 흐릿했다. 다행히 약현의 위치는 김정호가 작성한 ‘대동여지도’에 또렷하게 나온다. 바로 김정호가 약현에 살았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와 “약현성당백년사”와 주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약현은 약현성당과 한국경제신문사가 터를 잡은 산 언덕을 이르는데, 정확하게는 약현성당과 한국경제신문사 사이의 성요셉 아파트 앞길로 여겨진다. 지금은 춘향이 고개라고 부르는데, 염천교 쪽에서 아현동 삼거리로 넘어가던 옛길로, 이곳이 약고개(藥峴)였을 것이다. 50년 전만 해도 이 고갯길 주변에 숲이 우거져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약주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다 보니 약주의 고향을 찾는 것이 괜한 청승처럼 여겨지는데, 좋은 시절이 오면 약현에 약주의 고향이라는 표석 하나 정도는 세워질 것이다.
약주는 한일합병이 될 때까지 무사했다. 주세도 낼 일 없고, 술을 빚는다고 허가받을 일도 없었다. 술은 된장이나 고추장처럼 집안에서 아녀자들이 으례 음식의 한가지로 빚어 먹었다.

그런데 술이 국가의 통제를 받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이 주권을 강탈하고서부터다. 1909년 2월 처음 주세법을 만들었다. 일제는 조선의 관행을 무시하고 집에서조차 술을 빚으려면 자가용 면허를 받으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작성한 ‘조선주조사’ 통계에 따르면 한일합병이 될 무렵 조선 전체 가구의 7분의 1이 술을 제조했다. 소위 영업용이 아닌 자가용 면허를 낸 자가 1926년 대략 131,700가구였는데, 1928년 34,800가구, 1929년에는 265가구로 줄어들었고, 1932년 1가구가 되어 개인면허의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1934년에는 자가용 술 제조 면허제를 폐지해 버렸다. 이제 집에서 빚는 모든 술은 불법적인 밀주가 되었다.
수난 끝에 부활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약주가 건재했다. 가양주는 수배자의 처지가 되었지만 영업용 양조업자들이 만든 약주는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술의 용어에 변화가 생겼다. 청주가 일본술로 입양가 버렸다. 대신 약주가 조선 청주와 조선 약주의 통합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전까지는 약주와 청주의 구분이 없었는데, 일본인들이 법을 만들면서 차별화시켰다. 지금도 법적으로는 약주와 청주를 다른 개념으로 사용한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잠깐 살펴보자. 주세법에서 약주는 2% 이상의 누룩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청주에는 그런 규정이 없다. 청주에는 주정(돼지감자나 당밀 따위에서 추출한 95도가 넘는 알콜)이 들어가지만 약주에는 주정이 안들어간다. 약주는 13도 이하인데, 청주는 14도 이상, 25도 미만의 술이다. 약주는 주세율이 30%인데 청주는 70%다. 법적으로 이런 차이를 두고 있지만, 관습적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청주와 약주를 구분하지 않는다.

약주가 철퇴를 맞고 괴멸된 것은 3공화국 들어서다. 1965년 시행된 양곡정책으로 인해 1966년 8월29일부터는 밀가루만 사용하여 술을 빚게 했다. 약주뿐만 아니라 탁주도 그전까지는 쌀로 빚었다. 밀가루로 빚어본 적이 없었다. 외국에도 없는 기술이었다. 술도가들은 혼란에 빠졌다. 술의 면허와 제품 관리를 맡은 양조시험소에서는 밀가루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개발하여 술도가에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막걸리는 술이 되는데, 약주는 색깔이 푸르께하니 나오고, 쉽게 산패했다.

1963년 498개였던 약주업체가 1970년에는 259개로 줄어들었다. 물론 쌀·찹쌀·좁쌀로 빚던 증류식 전통 소주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약주업체는 1975년 45개이던 것이, 1990년에는 24개로 줄어들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일사불란하게 전개된 식량 통제정책으로 전통술의 기반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약주업자들은 대개 탁주 제조를 겸해, 때마침 국토개발사업과 새마을운동의 노동현장에서 막걸리가 호황을 누리면서 약주의 몰락을 모르는 체 했다. 오히려 원료 조달이 어렵던 쌀로 막걸리를 만들다, 구하기 쉽고 값싼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게 되면서 가격은 종전대로 받았으니 막걸리업자들은 신바람난 상태였다. 아무도 약주의 숨통이 끊어지는 것을 항의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약주는 잊혀졌다. 1977년 12월1일부터는 다시 쌀로 술을 빚을 수 있다는 조처가 내려졌지만 1979년 10·26이 일어난 닷새 뒤 모든 술은 다시 밀가루로 빚어야 한다는 지시가 떨어졌다. 암흑기는 다시 군사정권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다 88올림픽을 치르고 나서 온갖 재료로 만든 외국술이 국내로 들어오자 더 이상 술의 재료를 통제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제 목 조르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990년 1월1일 슬그머니 원하는 대로 원료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꼬박 24년 동안 우리는 우리 술을 목졸랐다. 손을 놓았을 때는 이미 전통술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진 뒤였다. 그 자리를 희석식 소주와 맥주가 계엄군처럼 무혈입성하여 버젓이 시민을 위로하는 벗이 되어 있었다. 약현에서 태어난 약주의 슬픈 운명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괴멸되었던 약주가 서서히 살아나고 있지 않는가.
약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국순당 백세주다. 지난해 백세주는 9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국의 960개 막걸리 제조장의 총매출이 1,200억원이었으니 단일품목 백세주가 올린 매출은 놀랄 만하다. 그 백세주를 개발한 사람이 배상면씨다. 그는 약주시장을 살려낸 공로자인 셈이다.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난 배씨는 대구농업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농예화학과를 다닐 무렵 교수가 만든 젖산을 양조업을 하는 삼촌에게 소개해 주면서 술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52년 29세때 삼촌의 도움으로 대구에 기린양조장을 차렸다. 10년간 기린소주·이화약주·합성매실주·리큐르 등 여러 종류의 술을 빚었다. 기린소주는 대구 지역에서 진로 다음 가는 명성을 얻었는데, 갑자기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려고 다른 곳에 묵혀 있던 사과 브랜디를 구입하여 소주와 혼합해 판매한 것이 잘못되어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았다. 그는 잠시 양조업에서 손을 떼고 약국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1963년 포항 대송양조장에서 탁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양조업에 복귀했다. 1967년부터는 전라도 순천에서 누룩공장을 운영하고, 공장 안에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를 두었다.

그는 1968년에 무증자 효소 제조 특허를 얻었다. 1982년에는 생쌀 발효법에 의한 전통술 제조 특허를 취득했다. 1989~94년 1,238번까지 일련번호를 붙여가면서 양조실험을 했는데, 그래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는 누룩공장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좀더 좋은 술을 빚을 수 있도록 자신의 기술을 알려주었다. “태양통신”이라는 회보를 만들어 무료로 돌리기도 하고 “전통주 제조 기술­탁주·약주편”이라는 책도 펴내기도 했다.


누룩만 빚던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88올림픽 무렵이었다.
“평생 막걸리를 연구하면서 사실 아무리 좋은 술을 만드는 방법을 발표해도 양조업자들이 도무지 이용하려 들지 않는 기라. 그래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기 올림픽 때야. 우리 술이 없다 이기야. 내 나이도 많지. 막걸리 연구한다고 해놓고 외국 사람에게 먹일 수 있는 우리 술 하나 못 만들고 죽어서 되겠나 싶어 강릉에서 약주공장을 시작했어. 아무리 세미나하고 지도해도 전혀 말을 안듣고 해서, 그럼 할 수 없이 내가 해야겠다. 내라도 만들어놔야겠다 했는기라.”
그는 이렇게 다짐한 후 강릉에서 이조흑주를 만들고, 수원에서 백세주를 만들었다. 하지만 판로를 개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존의 주류 유통업체에서는 약주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량 유통에 입맛을 들인 그들은 약주를 실속없고 번거롭게 여겼다. 그래서 국순당 영업사원들이 직접 술병을 들고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음식점 주인들도 “골치아파서 누가 먹어요?”라면서 약주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뒤끝이 안 좋은 저급술로 여겼고, 설이나 추석 그리고 제삿날에 쓰는 귀신술로 여겼다.


백세주로 꽃핀 전통약주

이런 역경을 백세주는 극복했다. 그 성공 요인은 복합적이다. 영업사원들이 직접 음식점을 찾아 다니는 게릴라식 판매전략, 약재를 많이 넣어 건강술이라는 이미지 구축전략, 보신탕과 함께 엮어 전통음식의 자존심을 강조한 광고전략, 아내가 권하는 술이라는 광고 문구 따위가 고비마다 기폭제가 되었다. 요즈음은 소주와 반반 섞어 오십세주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품질이었다. 백세주는 평생 술을 연구한 배상면씨의 노력의 결정체였다. 그는 전통 누룩 속에 많이 들어있는 라이조프스균을 추출하여 따로 배양해 개량누룩을 만들었다. 전통 누룩의 역가(전분을 당화시키는 힘)가 300이라면 개량누룩은 3,000~5,000까지 올라갔다. 누룩을 적게 쓰는데, 술은 훨씬 잘 됐다. 그리고 전통술 백하주의 기법을 발전시켜 고두밥을 찌지 않고 생쌀을 바로 발효시켜 술을 빚었다. 그 기술력으로 원료도 절감하고 누룩 냄새가 덜 나는 약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모든 기술을 개방했다. 원하는 사람에게 개량누룩을 팔고 기술도 가르쳐 주었다. 폐쇄적인 양조업계에서 그의 행보는 신선했다.

그러면서 그가 역점을 둔 일은 법률 개선이었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제도를 바꿔 나가면서 백세주의 활로를 찾았다. 1991년 백세주를 개발할 당시에는 공급제한 구역이 도내(道內)로 한정되어 판매량이 신통치 않았다. 배상면씨는 공급구역 제한 법령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마침내 1994년 약주의 공급제한이 풀렸고, 그때부터 해마다 백세주는 100%씩 매출이 신장되었다.

배상면씨에게 물었다.
“우리 전통술을 괴멸시킨 장본인은 식민지배자 일본인이 아니라 박정희 아닙니까?”
대기업도 약주시장에 뛰어들 만큼 시장도 탄탄해졌으니, 이쯤해서 지난 시절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었다. 왕조시대에도 금주령이 있었지만 그것은 흉년이 들던 때에 단기적으로 시행되었고, 또 중앙의 통제력도 강력하지 않아서 전통을 끊어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사정권 때는 강력한 행정력으로 술을 빚는 원료를 통제하는 바람에 우리 술은 고사하고 말았다. 비록 양곡이 부족하여 먹고살기 힘들었다지만 우리 술의 특수성을 인정할 줄 아는 융통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독재권력은 그런 배려를 할 여유도 안목도 없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이를 일사불란하게 시행하는 일만이 최고의 덕목이던 독재권력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약주는 고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배상면씨는 그 책임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양조업자들에게 있다며 손가락을 안으로 굽어보였다. 당시 양곡통제정책을 썼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통제받을 줄도 몰랐고 그것이 약주의 붕괴로 이어질 줄도 몰랐다. 군사정권도 몰랐고 양조업자들도 몰랐다. 배상면씨는 양조업자들이 영세하고 새로운 술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며 박정희 탓으로 돌리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이제 과거를 탓해 무엇하냐며 앞을 보자고 했다.


배상면 一家의 땀

배상면씨의 두 아들과 딸이 그의 뒤를 이어 술을 빚고 있다. 큰아들 배중호씨는 국순당 백세주를 이끌고 있고, 작은아들 배영호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배상면주가를 만들어 ‘산사춘’으로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딸 배혜정씨는 배혜정누룩도가를 만들어 서울에서 유행했던 합주(合酒·약주를 떠내지 않고 물을 섞지 않은 고급 막걸리)를 부활시켰다. 배상면씨는 매일 연구실과 공장을 순례하며 현장 사람들을 격려하고 다니는데, 때로 덩치가 커져 버린 자식들로부터 이런 푸념을 듣는다.

“아버지, 왜 한 자식만 술을 만들게 하지 그러셨어요?”
국순당과 배상면주가가 약주시장에서 부닥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배상면씨는 이렇게 독려한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기술력으로 하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너희가 앞서 갈 것이다. 내가 죽고 난 뒤에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한테라도 추월당한다. 그러니 이제 생동하는 약주시장에서 우선 너희끼리라도 경쟁해라, 너희끼리 경쟁하다 보면 감히 너희를 앞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는 세계의 어떤 술과도 경쟁이 가능하다. 그러니 너희가 사명감을 가지고 경쟁해야 한다. 아버지가 경쟁시키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배씨는 앞으로, 술을 빚는 이들이 교과서로 삼을 만한 기술책을 펴내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본격소주제조기술”이라는 일본책을 번역하고 있다. 젊은 사람을 시켜 번역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돋보기를 쓰고 더디지만 꼼꼼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는 일흔여덟 노인이 아니라 할 일을 잔뜩 쌓아둔 푸른 청년이었다. 약주의 혼을 일깨워낸 그를 위해 기꺼이 한잔 술을 건배!
 
출처 : 로드넷
글쓴이 : 飛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