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스크랩] 복날 더위를 ‘한 방’에 날리는 보양술(무술주)

그린테트라 2008. 10. 3. 22:56
[허시명의 우리술 紀行]복날 더위를 ‘한 방’에 날리는 보양술(무술주)

외부기고자 허시명 술기행가.여행작가(
twojobs@empal.com
 
 
 
술에 ‘소리’만한 안주가 있을까. 소리가 술을 부르고, 술이 소리를 이끌어낸다. 나는 외람되게도 술 한 잔에 소리 한 가락을 청했다. 내 청을 받은 이는 회갑을 앞둔 현역 교사이자 시조 명창이다.

그는 1998년 전주대사습대회에서 시조창으로 장원을 했고, 무형문화재 제41호 시조창 이수자로 지정된 이종록(59) 씨다. 그는 ‘정과정곡’을 한 자락 펼쳐 놓는다. 850년 전에 지어진 고려가요다. 사대부들이 즐겼던 가곡과 가사와 시조창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노래가 바로‘정과정곡’이다.

그리고 우리 말로 전해오는 고려가요 중 지은이가 밝혀진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이종록 씨가 살고 있는 부산 땅에서 지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입을 가만가만 벌리면서 소리를 뽑아올린다. 배 밑 단전에서 가슴을 지나 목울대를 타고 소리가 밀려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내 님믈 그리와 우니다니
산 접동새 난 이슷요이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
잔월효성이 아시리이다
넉시라도 님은 ㅣ 녀져라 아으
과도 허물도 천만 업소이다
힛 마라신뎌
니미 나 마 니시니잇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가슴을 파고드는 노랫가락에 취해, 나는 무술주 두 잔을 거뜬히 비워냈다.
고려 의종 5년(1151) 부산 동래로 귀양갔던 정 서(鄭敍)가 귀양지에서 임금을 그리면서 거문고 가락에 부른 노래다. 그는 과정(瓜亭, 오이밭 원두막)이라는 소박한 호를 지녔는데, 그를 기려 현재 부산 연제구에는 과정초등학교가 있다.

정 서는 의종의 이모부이며, 인종의 동서였다. 그는 인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환관들의 모함을 받아 본향인 동래로 쫓겨난 것이다. 정 서는 이 노래의 효험(?)을 보지는 못했다. 동래에서 다시 거제도로 쫓겨났고, 20년 만인 1170년(명종 1년)에야 귀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이 노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 널리 알려져, 훗날 궁중의 속악 악장으로 채택돼 기녀와 사대부들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그 악보가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전해오는데, 이종록 씨는 이 곡을 시조창으로 편곡하여 내게 들려줬다.

소리도 구수하고, 사연도 곡진하고 게다가 ‘정과정곡’이 전통 가곡의 시발점이 된 노래라니 술맛이 절로 났다. 이 상황에서 내가 우려하는 것은 술맛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일 뿐이다.

이종록 씨를 만난 것은 무술주(戊戌酒) 때문이다. 무술주는 개고기로 빚은 술로, 8월 복날이 제격이다. 무더위를 건너는 징검다리처럼 열흘 간격으로 심어놓은 복(伏)날을 맞을 때마다 나는 우리 선조들이 개고기(犬)를 잊지 말고 먹으라는 유훈(遺訓)을 이 날 속에 새겨놓았다고 생각한다.

동물성 재료로 빚은 특이한 술

이종록 씨 집안에서는 3대째 끊이지 않고 무술주를 빚고 있다. 무술주는 개고기를 썼으니, 동물성 재료가 들어간 특이한 술이다. 지방이나 단백질 성분은 술을 만들 때 가능하면 배제하는 요소다. 두 요소는 술을 망치거나 숙취를 불러오기 쉽기 때문이다. 쌀을 도정하는 것도 쌀의 겉면에 들어 있는 단백질이나 고분자 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무술주에서는 의도적으로 동물성 물질을 집어넣는다.

무술주는 구주(狗酒)라고도 부르는데, 개와 찹쌀과 누룩으로 빚기 때문이다. 어원을 따져 보면, 무(戊)는 음양오행의 토(土)에 속하고, 찹쌀도 토(土)에 속한다. 술(戌)은 12간痔?하나로 개를 뜻한다. 때문에 무술주는 찹쌀과 개로 빚은 술을 말한다.

이종록 씨 집안에서 무술주를 처음 빚은 것은 그의 조부인 남곡(南谷) 이태하(1885~1974) 때부터다. 고성 이씨인 그의 집안은 경남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에서 오래도록 터를 잡고 살았다. 남곡은 시골에 살아도 논에 물 대는 법도 모르고 평생 글공부에 전념한 선비였고, 두 권의 문집을 남겼다. 남곡은 퇴계를 흠모하고, 퇴계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퇴계가 건립한 안동 도산서원에 자주 출입했고, 도산서원에서 제사가 있으면 행사 진행자인 헌관(獻官)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남곡의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못했다. 기력이 모자라고 눈이 침침하고 자주 편찮으셨다. 남곡은 도산서원에 출입하면서 노인들에게 무술주가 좋다는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위해 무술주를 빚어 드리기 시작했다.

남곡의 아버지는 술은 식전 또는 식후에 한 잔씩 마셨다. 그 분량은 많지 않아서 간장 한 종지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남곡의 아버지는 기력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93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돌아가실 무렵에는 아침 드시고 어지럽다고 자리에 누운 뒤 3일째 되던 날 “내가 왜 이렇노? 왜 이렇노” 하시면서 큰 고통 없이 운명했다.

도산서원에서 술을 가져온 남곡도 끼니마다 반주로 마셨다. 무술주는 탁주여서 여름에는 보관이 어려웠는데, 의령집 뒤안의 대밭에 물이 나는 곳이 있어 그곳에 술항아리를 묻어 두고 마셨다.
한 끼에 한 잔을 마셨는데 결코 얼굴이 붉어지는 일이 없었다. 남곡도 85세까지 안경을 쓰지 않고 글을 보셨고, 89세까지 살았다. 이종록 씨의 백부도 무술주를 드시고 87세까지 사셨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서는 무술주를 효험이 확인된 귀중한 보신주로 여기게 되었다.

무술주를 빚으려면 우선 좋은 개를 골라야 한다. 이종록 씨는 개를 견(犬)과 구(狗)로 구분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견(犬)은 애완견이나 들개나 늑대류를 말하는데, 보신용은 반드시 구(狗)를 골라 써야 합니다. 구(狗)에도 백구와 흑구와 황구가 있는데, 황구를 최고로 치지요. 좋은 황구의 생김새는 몸집이 크지 않고, 귀가 쫑긋 서서는 안 되고 너풀너풀해야 하며, 관절이 부드럽고 통통해야 하며, 꼬리는 복슬복슬하며 탐스럽고 등에 짊어진 듯 위로 도르르 말려 있어야 하고, 털은 조밀하면서 길어야 합니다. 눈에 윤기가 없어야 하며 인상이 온화하고 중후해야 하고, 성질은 따뜻하고 악착같지 않아야 합니다.”

흔히 아무에게나 꼬리를 살살거리면서 다가오는 누렁이나 똥개가 여기에 속한다. 시골 똥개는 풀어놓고 키우고, 잡식성이어서 육질이 부드럽다. 스트레스도 안 받고 성격도 좋아서 고기 맛도 좋다고 평가된다. 이종록 씨가 지적한 개는 그런 종류다.

黃狗가 최고의 재료

이종록 씨는 “그런 황구는 보약이어서 성한 사람이 먹기는 아깝지요. 소화가 잘 되기 때문에 위에 부담이 없고, 아무리 먹어도 더부룩하지 않습니다. 고기에서도 아무런 잡냄새가 나지 않고 부드럽고 구수하며 몸을 휘감는 훈기가 돕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요즘 시판되는 개고기들은 도사견의 혼혈종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덩치가 크고 뼈마디가 튀어나오고 흉악하게 생겼는데, 근수가 많이 나가고, 새끼를 많이 낳기 때문에 많이 사육된다. 좁은 철망 안에서 집단 사육되는 도사견은 가죽이나 살을 잡아당기면 늘어지기 때문에 고기 맛이 좋지 않다. 이런 개들은 약이 되기 어려워 무술주를 빚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개고기는 네 다리만 쓰는데, 솥에 넣고 24시간 달인다. 센 불로 확 끓인 다음 약한 불로 지긋이 끓인다. 밤새도록 끓이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잔다. 요즘도 이종록 씨의 부인인 이시남(56) 씨는 “가스불을 쓰면 미덥지가 않아 마당에 화덕을 만들어놓고 쑥대와 나무로 불을 지핍니다”라고 했다. 이때 찹쌀 한 컵 정도를 넣고 함께 달인다.

24시간을 달이고 나면, 개고기 살이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풀어지는 것이 보인다.
술을 빚을 때는 개 곤 국물을 쓰는데, 이때 국물 속에 들어 있는 가늘게 풀어진 개고기와 찹쌀도 함께 쓴다. 다만 국물에 뜬 기름기는 걷어 내고 식혀 사용한다.

그 다음에 준비해야 할 것이 찹쌀 고두밥과 누룩이다. 이종록 씨는 찹쌀은 너무 길쭉하지 않고 흰색이 분명하며 추운 지방에서 생산된 것이 좋다고 했다. 의령에 살 때도 좀더 서늘한 합천 산골짜기에서 수확된 찹쌀을 구해 썼다고 한다.

찹쌀은 좀 덜 깎은 9분도를 사용했다. 흔히 술을 빚을 때는 쌀의 겉면을 깎아 단백질을 덜어내고 쓰는데, 무술주는 영양분을 생각하여 덜 깎은 것을 사용한다. 찹쌀은 시루에 쪄 잘 식혀 사용한다. 누룩은 의령 고향 마을에서 빚은 것을 가져다 쓰는데, 큰 피자 모양으로 넓적하고 얄팍하게 생겼다.
재료가 모두 준비되면 고두밥 3되에 누룩 2되의 비율로 잘 섞는다. 누룩이 많이 들어가는 셈이다. 이때 물은 개 곤 국물을 사용한다. 국물은 찰박찰박할 정도로 붓는데, 오로지 개 곤 국물로만 술을 빚어야 한다. 그래서 누룩을 많이 넣을 수밖에 없다. 개 곤 국물은 단백질과 지방 성분이 많아 자칫하면 술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은 여름날이면 3일 만에 끓어오르고 5일째면 용수를 박아 떠낼 수 있다. 겨울이면 술 익는 시간이 길어져 15일 정도 걸린다. 술항아리는 방 안에 둘 때는 공기가 통하도록 삼베보자기만 덮고, 밖에 둘 때는 삼베보자기를 덮고 바람이 통할 간격을 두고 뚜껑을 얹어 놓는다. 항아리를 땅에 묻어 놓으면 술이 더 잘 된다.

무술주는 한 번만 술밥을 비벼 넣는 단양주로, 제조 기간이 짧다. 술색은 노란 빛이 돌고 탁하다. 술지게미를 채에 걸러내지 않고, 용수를 박아 그대로 떠내는 탁주다.
내가 ‘정과정곡’을 들으면서 마신 무술주는 빚은 지 1주일이 되고, 떠낸 지 하루가 된 것이었다. 냉장 보관한 것이지만 싸한 맛이 돌았다. 약간 시기는 했지만 진저리를 칠 정도는 아니었다. 여름이어서 신맛이 많이 도는 편이었다.

아직 용수를 박지 않은 술항아리가 있어 술을 떠 먹어 보았더니 신맛이 덜하고 맛이 진했다. 용수 안으로 걸러진 술에는 엷게 기름이 떠 있었지만, 술잔에 따르고 보니 기름기는 보이지 않았다. 은근하게 개 곤 국물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새콤한 술 냄새에 가려 가늠하기 어렵다. 술맛은 느끼하거나 거북하지 않았고, 혀에 찰지게 감겼다.

무술주는 적어도 조선 중기 때부터 있었던 술이다. 남곡이 도산서원에 출입하면서 무술주를 배워 왔다는 얘기는 신빙성이 있다. 퇴계 이 황이 필사하여 가까이 두고 본 ‘활인심방’(活人心方)에 무술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활인심방’의 원제목은 ‘활인심’(活人心)으로 명나라 주 권(1378~1448)이 쓴 책이다. 주 권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열여섯번째 아들로, 말년에는 도가 사상에 심취한 인물이다. ‘활인심’은 도가의 양생사상을 바탕으로 쓴 의술서로, 평이한 언어로 쓰여 있어 조선시대 때 널리 읽혔다.
‘활인심방’에 등장하는 술은 서여주(薯킦酒)·지황주(地黃酒)·무술주 세 가지다.
서여주의 서여는 산에서 나는 참마를 이르는데, 보신과 양기를 도와주는 약재다. 서여주를 만드는 방법은 우선 서여의 껍질을 벗긴다. 산에서 캐 온 서여는 10여 일 동안 햇볕에 말리면 껍질이 잘 벗겨진다. 이것을 푹 쪄 말린 것 한 근과 우유 세 냥을 섞어 잘 반죽해 계란만하게 빚어 두었다가 술 반 되에 한 개의 비율로 넣어 저장해 둔다. 그리고 잘 삭았다고 생각될 때 개봉해 마신다.

지황주의 지황은 성질이 차고 독이 없는데 이를 오래 복용하면 몸이 거뜬하고 노쇠를 모른다고 했다. 한방에서 쓰는 숙지황은 지황을 아홉 번 쪄 말린 것이다. 쌀 한 말과 생지황 세 근의 비율로 함께 쪄 누룩에 띄워 술을 담가 조금씩 약으로 마신다.

원기를 보하고 양기를 돋워주는 보신주

무술주는 우선 찹쌀 세 말을 찐다. 복(伏)날에 큰 개 한 마리를 가죽과 내장을 버리고 푹 고아 진흙(묵)처럼 되게 한다. 이것을 찐 찹쌀과 섞어 누룩과 반죽하여 띄운다. 술을 담가 두고 빈 속에 한 잔씩 마시면 원기를 보하고 노인에게는 더욱 좋다고 했다.

무술주를 포함해 ‘활인심방’에 나오는 술들의 공통점은 원기를 보하고 양기를 돋워주는 보신용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술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활인심방’에서는 ‘술은 본래 피를 고르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석 잔 이상 마시면 오장을 뒤집고 성격을 거칠게 만들어 미친 사람처럼 날뛰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퇴계(1501~70) 선생은 무술주를 빚어 드셨을까. 퇴계는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젊어서 독서를 지나치게 하여 몸을 상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활인심방’을 지침서로 적극 활용했다. 퇴계의 15대손인 이동환(70) 씨는 “퇴계 선생은 글공부의 본령을 마음공부에 두었는데, ‘심경’(心經)은 엄부(嚴父)처럼 대했고, 그에 못지않게 ‘활인심방’도 비중 있게 대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동환 씨도, 그의 큰형이자 퇴계의 15대 종손인 이동은(97) 씨도 퇴계 선생이 무술주를 드셨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퇴계 집안에서 전해오는 술도 따로 있지 않다. 예전에는 집에서 술을 빚어 제사를 지냈지만, 요즈음은 시중 술을 사다 쓴다고 했다.

물산이 풍부하지 않은 경상도 지방이기도 했지만, 풍류와 거리가 먼 도학자(道學者)로서 퇴계는 호사스러운 음식을 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제자 김성일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도산에서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할 때 보니 밥상에는 가지·무·미역뿐이었다. 끼니마다 세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고, 여름에는 마른 포(脯) 한 가지 뿐이었다’고 했다. 퇴계는 자신을 두고 “나는 참으로 박복한 사람이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체한 듯하여 속이 편하지 않고 반드시 쓰거나 담백한 것을 먹어야 장과 위가 편안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퇴계는 술을 어떻게 대했을까. 퇴계의 주량은 제자 이덕홍의 기록에 따르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으나 다만 거나할 정도일 뿐이었다’고 했다. 제자 김성일의 기록에 따르면 ‘선생은 술을 마셔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고 약간 거나하면 그만두었다. 손님을 접대할 때도 그 양에 따라 권하였으나 그 정만은 듬뿍하였다’고 했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과 밥을 내오는데, 집안 사람에게 미리 알려 한 번도 손님 앞에서 말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퇴계는 제자 김응생에게 준, 술을 경계하라는 글에서 ‘술은 사람의 화를 부르고 내장을 상하게 하며 덕성을 잃게 하여 자신을 죽이고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힘써 자제하여 스스로 다복한 것을 구하라’고 했다.

술과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이러했으니, 퇴계가 황구를 잡아 무술주를 장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퇴계의 후학들이 퇴계가 탐독했던 ‘활인심방’을 자신들의 수양서로 삼아 책 속에 나온 내용을 실천하고, 그 속에 나온 음식이나 술을 빚어 먹었을 가능성은 높다. 이종록 씨의 조부 남곡이 도산서원에서 무술주를 배워 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노인에게 좋은 술
무술주의 가장 오래 된 기록은 ‘활인심방’이다. 명나라의 주 권이 언급했으니 무술주는 15세기 무렵 중국에 이미 존재했고, 우리 나라에는 그 이후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퇴계가 활동했을 때는 충분히 알려졌을 테고, 그 결과 1610년에 완성된 ‘동의보감’에 수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의보감’에서는 무술주를 두고 ‘술이 되면 빈 속에 한 잔씩 먹는데 원기를 잘 보한다. 노인이 먹으면 더 좋다’고 평했다. ‘활인심방’과 맥을 같이하는 지적이다. 그 뒤로도 무술주는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임원십륙지’ ‘양주방’에 소개됐다.

그런데 빚는 방법이 다른 무술주도 등장하게 됐다. ‘우리 술 사전’(정동효, 중앙대학교 출판부, 1995)에서는 옛 문헌에 등장한 독특한 무술주를 소개하고 있다. ‘누렁개 한 마리를 가죽을 벗겨 머리와 내장은 빼 버리고 네 동강을 내 알맞은 독에 넣은 다음 찹쌀 한 말이나 한 말 반을 쪄 누룩 가루를 알맞게 섞어 역시 독에 담아 1년간 땅에 묻어 익히는 방법이다.

이듬해 묻은 지 1년이 되는 날 뚜껑을 열어 보면 고기가 다 녹아 말갛고 맛이 맑고 톡 쏘는 술이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술은 특히 노인에게 좋으며 계속 세 마리분을 먹으면 온갖 병이 다 없어지고 기운을 극히 보한다고 한다. 무술주를 빚을 때 주의할 점은 개를 잡아 피를 씻지 말아야 하며, 술 빚던 날을 적어두어 돌이 되거든 꺼내야 한다는 것이다.”

개고기를 삶지도 않고 동강내 직접 술을 빚는다니 술이 될까 싶은 의구심이 든다. 게다가 피까지 씻지 않고 담아냈으니 알콜이 든 술이 아니라 보신을 위한 양생 음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종록 씨 집안에서 끼니 때마다 반주로 간장 종지로 한 잔 정도만 마신 것도, 무술주를 마음을 움직이는 술로 보지 않고 몸을 보하는 음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대(三代)가 마주앉아 마셔도 한 끼에 석 잔 뿐이어서, 술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끼에 한 잔을 마셔야 될 술이건만 나는 맛을 본다는 핑계로, 시조창을 듣는다는 핑계로 무술주 예닐곱 잔을 마셨다. 안주인인 이시남 씨는 의령 고향 마을에서 잡아온 청자색 다슬기 국물을 내오고, 김해 평야 복판에 자리잡은 집 마당에서 오이를 따 오고, 술을 담그다 여퉈 둔 삶은 개고기를 썰어 내왔다. 그러나 안주는 소리가 제일이다. 나는 다시 술기운을 빌려 이종록 씨에게 노래를 청한다. 이번에는 송강(松江) 정 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張)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숲에 가기 곧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잿납이 휘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출처 : 로드넷
글쓴이 : 飛禽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