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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허시명의 우리 술 紀行 ② -동동주

그린테트라 2008. 10. 3. 22:51
<월간중앙 2001년 5월호>
 
전통주의 ‘母體’ - 동동주에 몸을 동동 싣고
허시명의 우리 술 紀行 ② -동동주
허시명
 
개미가 떠 있는 술

권오수씨는 1년만에 춘천 동래양조장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은 범식품화학공업주식회사의 양조기술연구소 연구직이었다. 술이 안된다고 아우성치는 술도가들을 돌아다니면서 기술 자문을 했다. 흔히 1주일씩 양조장에 체류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권씨는 “그때 전국적으로 큰 양조장은 내 손이 다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다 1974년 용인 민속촌으로부터 제의를 받았다. 민속촌 허가를 받았는데, 술 빚을 사람은 선생밖에 없으니 도와달라며 민속촌 부장도 찾아오고 사장도 찾아왔다. 그는 싫다고 했다. 그러다 조건부로 구경 한번 해보자며 따라나섰다. 30만평 너른 터를 하루 종일 돌아보니 구경올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농촌하고 똑같은데 무엇을 보러 올까 싶었다. 그래서 마다했더니 다시 사람이 찾아와 파는 것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 술만 만들어 달라고 애걸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가 1974년 10월 민속촌을 개장하고 한달 뒤였다.

당시 민속촌에서는 찹쌀을 원료로 술을 빚는다는 면허만 덜렁 받아놓고 있었다. 권씨는 이왕 비싼 찹쌀로 빚으니 동동주를 만들자고 했다. 처음에는 쌀을 동동 띄워 민속촌의 장터 음식점에 공급했다. 차츰 민속촌이 알려져 외국인들이 찾아오면서 문제가 생겼다. 외국인들이 술잔의 쌀알을 수저로 건져내거나, 지저분하다며 마시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쌀알을 오물로 여긴 것이었다. 그 뒤로 권씨는 쌀알을 건져내고 술을 맑게 내서 팔기 시작했다. 양조장은 1970년대 후반이 전성기였는데, 일요일에 술이 많이 나갈 때는 20ℓ짜리 통으로 50개가 넘게 나갔다.

권씨가 민속촌에서 나와 독립하게 된 것은 동동주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이를 누군가에게 승계해 주어야 되는데, 월급쟁이 사장으로는 제한이 많았다. 그래서 1993년 화성에 부의주 양조장을 차리게 되었다.

그가 용인 민속촌에서 빚던 동동주 이름을 마다하고, 부의주라고 이름을 붙인 데는 나름대로 소신이 있어서였다. 동동주는 6·25 당시 부산 피난 시절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였다. 피난 시절 양조장도 문을 닫고 단속도 심하지 않아서 밀주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많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시기에 사람들은 술로 위로받고 싶어했다. 아무리 비싸더라도, 아무리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술은 원활하게 유통되었다. 자연 술장사는 이문이 많이 남는 일이었다. 동동 뜬 쌀알을 걷어낼 겨를도 없이 술을 냈는데, 오히려 허기를 달래 주는 구실까지 한다 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 동동주라는 이름을 용인 민속촌에서 차용해 쓴 것이다.
그런데 권오수씨가 사용한 부의주는 개미가 떠 있는 술이라는 뜻이다. 옛 문헌에는 동동주에 관한 기록은 없고, 부의주 기록만 나온다. 그 옛 이름을 되살리고자 권오수씨는 고집스레 부의주로 문화재 신청을 냈다. 자신만이라도 그 이름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문화재로 지정받은 동동주는 권오수씨의 부의주가 유일하다. 그의 술은 노르짱하고 맑은 11도짜리 약주다. 약주라서 이물질?제거하고 투명하게 내야 한다. 그래서 부의주에는 쌀알이 떠 있지 않다. 누룩과 찹쌀만으로 빚어 술은 끈끈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돈다. 지역적인 특색을 거론하자면 권씨의 부의주는 안동부의주다. 안동소주와 뿌리가 같아서 이 술을 증류하면 안동소주가 나온다.
그런데 현재 시중에서 동동주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술들은 권씨의 부의주와 달리 탁주거나 탁주에 가깝다.
동동주의 고향은 부산

탁주에 동동주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상품화한 곳은 부산양조다. 1990년 1월1일부터 쌀로 막걸리를 빚을 수 있게 되자 부산양조에서는 그해 4월 동동주를 출시했다. 현재 부산 생동동주가 그 제품인데, 도수 6도의 탁주다. 쌀 50%, 밀가루 30%, 전분당 20%로 만든다. 쌀의 비중이 높은 막걸리인데, 그 이전의 밀막걸리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동동주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부산양조에서는 이름에 걸맞게 쌀알을 동동 띄웠다. 보통 막걸리는 채나 기계로 걸러내기 때문에 모두 으깨져 동동 뜰 것이 없다. 그래서 부산양조에서는 형태가 살아있는 쌀알을 따로 발효시켜 마지막 단계에서 막걸리와 섞는 기술을 사용했고, 이를 특허등록까지 했다.

부산양조에서 쌀막걸리를 동동주로 내놓은 뒤 여기저기 술도가에서 뒤를 따랐다. 그래서 현재 탁주회사에서 빚는 쌀막걸리들은 대체로 동동주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피난 시절 처음 이름을 얻는 곳도 부산이요, 쌀막걸리의 별칭이 된 곳도 부산인 만큼 이래저래 동동주의 고향은 부산인 셈이다.
현재 법적으로 동동주는 술의 분류 단위가 아니다. 탁주와 약주와 소주처럼 법적인 자기 영역이 없다. 그래서 쌀알만 뜨면 사람들은 그 탁한 정도에 상관없이 동동주라고 주장한다. 그런다고 하여 동동주가 아무 경계도 없는 술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우리 술은 곡주가 가장 흔하고, 그 중에서 쌀과 찹쌀로 빚는 술이 흔하다. 고두밥을 쪄 누룩과 함께 버무려 술독에 담아 발효시키면 처음에는 밑에서 불이라도 지핀 듯 부글부글 끓는다. 옛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물 속에 불이 든 줄 알았다. 그래서 ‘수불’이라고 불렀고, 이 말이 구르고 굴러 ‘술’이 되었다.
그렇게 끓던 술이 4~5일쯤 지나면 잔잔해지면서 쌀알이 둥둥 뜬다. 쌀 속에 있던 전분이 분해되고, 쌀의 외피를 형성하는 섬유질만 공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술이 어느 정도 숙성된 상태인데, 이때 용수를 박으면 맑은 술이 쌀알과 함께 용수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처음으로 마실 만한 술이 나오는 순간인데, 이 술이 바로 동동주다. 하지만 완전히 발효된 상태는 아니어서 이렇게 술을 내리면 보존 기간이 짧다.

다시 한 4~5일쯤 두고 보면 쌀알마저 가라앉는다. 형태를 유지하던 섬유질마저 무너져내린 것이다. 비로소 술지게미가 다 가라앉은 안정된 술이 된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다 떠낸다. 이것이 13~16도의 약주고 청주다.
여기서 청주는 맑은 술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약주와 청주를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청주가 일본식 청주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고, 현재의 주세법도 그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을 뿐이다.

맑은 술을 다 떠내고 나면 술독에는 술지게미만 뻑뻑하게 남는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술밥을 떠 먹기도 하는데, 보통은 이 술지게미에 물을 부어 재차 발효시킨다. 건더기만 남고 국물이 모자라니 물을 붓고 떠 끓이는 모양새다. 서너시간을 두면 다시 발효가 이뤄진다. 이를 채에 담아 손으로 비벼 거르면 술지게미가 으깨지면서 탁한 막걸리가 된다. 술 도수는 약주의 절반쯤 되어 6~8도쯤이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서민들이 즐겨 먹던 농주고 탁배기며 막걸리였다.
이렇듯 동동주는 분명히 제 영역을 지닌 술이다. 그래서 권오수씨는 동동주야말로 모든 술의 모체라고 말한다. 모든 술은 동동주의 단계를 거쳐가게 되는데, 동동주를 잘 빚으면 약주나 탁주·소주 또한 잘 빚게 된다고 한다.
동동주는 ‘밀주’의 대명사?

물론 현재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널리 팔리는 동동주는 이런 영역을 고수하고 있지는 않다. 상표 없고, 제조장 표시가 없는 밀주의 대명사로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판매량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다. 왜 이렇게 음식점마다 동동주를 취급할까? 시판되는 동동주의 유형을 살펴보자.
첫째가 솜씨 좋은 음식점 주인이 직접 빚은 술이다. 소박한 가양주 수준이다.

둘째가 탁주 제조장에서 음식점이나 주점용으로 20ℓ짜리 말술로 공급하는 쌀막걸리다. 탁주 제조장은 PET병에 담아 팔기도 하는데, 거래처의 요구에 맞춰 말술로 공급한다. 그러면 음식점에서는 도자기병이나 작은 단지에 담아 내놓는다. 번거로워 보이지만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음식점들이 이 방식을 많이 채택하고 있다. 계산해 보면 대체로 20ℓ짜리 쌀막걸리 한말에 2만원 안팎 한다.
보통 음식점에서 동동주는 5,000원하는데 그 양이 1ℓ가 못된다. 700㎖에서 후해야 1ℓ가 될까 말까다. 그러면 2만원짜리 말술을 10만원에 팔게 된다. 음식점에서는 5배 장사를 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음식점에서 술값은 3배 장사다. 출고가 2,000원짜리 약주가 들어오면 6,000원에 파는 것이 관행이다. 그러다 보니 동동주가 구미에 당길 수밖에 없다.

셋째, 여러 종류의 막걸리를 사와 술독에 섞어 붓고, 그집 나름대로 특유의 감미를 하는 경우다. 특별히 술맛을 더 잘 내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문을 더 남기기 위한 방편이다. 동동주용 말술을 따로 공급받을 형편이나 규모도 못되는 상황에서 취하는 임기응변이다.
막걸리 1.2ℓ의 출고가격이 1,000원쯤 한다. 동네 슈퍼 소매가격은 1,500원쯤 하는데, PET병째 내놓으면 3,000원 이상 받기 어렵다. 그래서 술병을 따서 작은 단지에 붓고 요구르트를 조금 타 5,000원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배가 남는 장사가 된다.

넷째, 녹차 냉면집이나 오리구이 전문점 같은 체인점에서 판매하는 동동주다. 반주로 마시기 적합한 저도수로, 음식에 어울리는 녹차동동주·매실동동주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녹차를 대단위로 재배하는 지리산 화개마을에 가면 녹차동동주를 빚는 곳이 있다. 녹차냉면을 개발한 산골제다의 김종관씨는 냉면집에서 수육도 판매하기 때문에 술이 필요하겠다 싶어 녹차동동주를 빚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동동주를 빚는 방법은 독특하다. 냉면 재료인 우리 밀을 빻고 남은 밀기울을 사용한다. 보통은 밀기울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는데, 산골제다에서는 밀기울을 그냥 고두밥, 녹차 분말과 함께 버무려 술을 빚는다.

1주일쯤 지나면 술이 된다. 누룩 아닌 밀기울만으로 술이 되는 것이 신통한데, 이는 녹차 분말이 발효를 돕기 때문이라고 김종관씨는 말한다. 그래서인지 술심은 약한 편이지만 누룩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맥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종관씨는 주류사업을 확장할 생각은 없고, 녹차냉면과 궁합이 맞는 녹차동동주를 만들어 체인점에 공급하는 수준을 지키고 싶다고 했다.
다섯번째가 말 그대로 상업적 밀주다. 유통조직망을 확보해 탈세를 목적으로 술을 빚는 경우다. 이때 동동주라는 이름은 가장 뒤집어쓰기 쉬운 가면이다. 이런 밀주업은 양조장에서 퇴사한 이들이 달리 돈벌이 수단을 찾지 못해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바야흐로 동동주가 수면 아래에서 각축하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좋지 않은 소문도 뒤따른다. 쌀알을 동동 띄우기가 어렵기에 식혜를 사다 붓거나 청량감을 높이려고 사이다나 카바이트를 넣는다거나, 막걸리를 사다 요구르트로 감미하여 판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떠돈다. 한 사람이 만드는 술이 아니다 보니 받게 되는 의심이다.

낯선 곳에서 찾는 혀끝의 즐거움

이런 많은 변수에도 불구하고 나는 메뉴판에서 동동주를 발견하면 서슴없이 동동주를 주문한다.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처럼 낯선 맛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래도 술이 미덥지 못하면 음식점 주인을 불러 동동주가 어디서 누가 빚은 것이냐고, 그 술이 믿을 만하냐고 물어본다. 비록 시어터지고 군내나는 술이라도 음식점 주인이 손수 빚었다는 말을 들으면 정겹다. 일제 식민지와 개발독재시대에 숨막히게 밀주 단속을 해왔건만 여전히 우리 술이 우리 손 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아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집에서들 동동주를 빚어 먹어보자고 권하고 싶다. 제집 김치만한 것이 없듯 제집 술만한 것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정도까지는 감히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술 빚는 것이 얼마나 까다롭고 술맛을 관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면 경주 술축제에 나온 우리 술들에 대한 인식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자, 집에서 동동주를 담아먹어 봅시다.’
그래서 필자는 내년쯤에는 전국대회 규모의 가양주 경연대회라도 한번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제각각 집에서 빚어 먹는 술을 들고 나와 경연해 보는 자리, 그런 자리 말이다.
 
 
4월초 경주에서 술축제가 열렸다. 올해로 네번째인데,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민속주와 특산주들이 모인 자리였다. 한국전통민속주협회 회장 박승규씨, 주류신문 발敾?안용갑씨와 함께 아침을 먹기 위해 행사장 앞 손두부집에 들어갔다. 안주인이 따뜻한 난로 옆자리를 권했다. 주방 벽에 걸린 식단을 보니 동동주가 적혀 있었다. 술이라고는 동동주 하나뿐이었다.

“동동주는 어디서 가져옵니까?”
“제가 빚어요.”
안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솜씨가 좋으신가 봅니다.”
“경주에서 제 나이 또래 사람들은 다 술을 빚을 줄 압니다.”
안주인은 50이 넘지 않아 보였다.
“그래요? 누룩을 써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럼요. 집에서 직접 딛어요.”
신통해 하고 있는데, 안용갑씨가 재차 물었다.
“밀주잖아요?”
“예. 예전에는 단속을 심히 했지만 지금은 안해요. 음식점에 오는 손님들에게만 드리려고 한 독아지씩 빚어 파는데 뭐 몇푼 되나요? 한잔 드실랍니까?”

안주인은 주저없이 말했다. 그의 당당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식단에 적힌 순두부나 두부된장찌개처럼 동동주를 메뉴의 한 가지로 여기고 있었다. 아침이라 술을 마다자 그는 “그냥 한잔씩 드릴 테니 맛 보시라”고 한다. 쌀알이 동동 뜬 식혜 빛의 술은 싸한 맛을 지니면서 날카로웠다. 목젖을 타고 가볍게 넘어갔지만 술심은 셌다. 커피잔으로 한컵 정도를 마셨을 뿐인데 이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올랐다.
 
맛도, 빛깔도 제각각

동동주, 그 이름이 운치 있어 좋다. 쌀알이 동동 뜬다하여 동동주인데, 한잔 마시면 몸마저 동동 뜰 것 같은 珦甄? 그래서 음식점에 가거나 파전이라도 부쳐 파는 술집에 가면 동동주를 주문한다. 동동주는 맛도 제각각이다. 목이 긴 도자기병이나 작은 단지에 담겨 나오기에 상표도 없고 제조장 표시도 없다. 정체를 알 길 없는 익명의 술이다. 의심의 눈빛을 띠면서도 매번 용기를 내 동동주를 시킨다. ‘이 집은 어떤 맛일까?’하는 낯선 맛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서다.

어디 맛뿐인가? 동동주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이다. 어떤 곳에서는 막걸리처럼 탁하디 탁한데 그 안에 부서진 쌀알갱이가 둥둥 떠돌고, 어떤 곳에서는 약주처럼 노르짱하니 맑은데 쌀알은 보이지 않는다. 어느 것이 진짜 동동주인지 도통 알 수 없다. 그래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동동주를 찾아 나섰다.
70~80년대를 풍미했던 용인 민속촌의 동동주가 그 대표적 술이다. 아무도 쌀로 술을 빚을 수 없던 시절 대통령 박정희의 시혜 속에 금복주의 ‘경주법주’와 더불어 쌀로 술을 빚었던 독보적 존재였다. 민속촌 밖에서는 술잔에 쌀이 뜨면 범죄였지만, 민속촌 안에서는 술잔에 쌀이 유유자적하게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술이 명성을 얻자 민속촌 구경은 뒷전이고 동동주를 맛보려고 민속촌을 찾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용인 민속촌의 양조장을 운영한 사람은 권오수(78)씨다.

그이는 1974년 민속촌이 개장하던 해부터 월급사장의 형식으로 민속촌 안에서 동동주를 빚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1993년 경기도 화성에 부의주(浮蟻酒) 양조장을 차려 독립할 때까지 꼬박 20년 동안 민속촌에 있었다. 지금은 연로하여 둘째 아들인 권기훈씨에게 뒷일을 맡기고 서울 노원구 창동 집에 칩거하고 있었다.

권오수씨는 기력이 많이 떨어져 몸놀림은 무거웠지만 목소리는 기운찼다. 젊어서 헌헌장부라는 소리를 들었을 만큼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좋아 보였다. 그이가 아마도 우리 술에 관련하여 신문·방송에 가장 많이 소개된 인물일 것이다. 1970년대부터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던 유일한 장인이기도 했지만 민속촌에서 드라마를 찍던 배우나 방송국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기에 손쉽게 언론으로부터 집중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권오수씨는 안동 권씨다. 경북 안동과 의성에서 성장하면서 할머니에게 술 빚는 법을 배웠다. 그가 떠올리는 가장 오래 된 기억은 다섯살때 할머니 등에 업혀 들어갔던 술광의 광경이다. 어두운 술광에 크고 작은 술독이 일고여덟개 있었다. 할머니는 그를 내려놓고 술을 손으로 찍어 맛보기도 하고 젓기도 했다. 할아버지 형제도 여럿이고, 고모 둘에 아버지 형제도 여섯이어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권씨는 그 대가족의 맏손자였다.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술맛이 여러번 변하는 줄도 알았다. 처음에는 단맛이 돌다 차츰 신맛으로 가더니, 마지막에는 쓴맛으로 변했다. 할머니 몰래 술광에 들어가 달착지근한 술밥을 자꾸 집어먹다 취해 술광에서 잠들기도 했다.

권씨는 해방 뒤 서울로 올라와 군대 문제 때문에 관직에 있기도 했고 사업도 하고 월급쟁이도 했다. 술 빚는 일은 밤에는 편히 잘 수 없고, 어린애 키우듯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봐야 해서 이것 아니면 못살까 싶어 직업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40대 중반이 되어 문득 월급이나 받고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 춘천에 있는 동래양조장을 인수했다. 그곳에서 약주를 빚었는데 밀가루만 써야 하는 재료의 한계 때문에 술맛 내기가 어려웠다. 전국 어느 술도가나 똑같이 겪던 위기였다.
1960년대 중반 춤을 추었던 탁·약주 원료의 변화 양상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1965년 3월30일까지 쌀 100% 사용.
1965년 3월31일부터 쌀 80%, 잡곡 20% 사용.
1966년 5월15일부터 쌀 20% 이하, 잡곡 60% 이상, 고구마 전분 20% 이상 사용.
1966년 8월28일부터 밀가루 100% 사용. 쌀 사용 전면 금지.
국세청에서 어느날 갑자기 떨어뜨린 지시를 술도가들은 군말없이 따라야 했다. 이런 조처는 식량 수급정책으로 빚어진 일이었지, 술의 품질을 감안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자 죽어나는 것은 술도가들이었다. 지시대로 술을 빚어 봤지만 술이 잘 될 리 없었다. 쉽게 시고 망가졌다. 더욱이 밀가루 100% 사용은 유사 이래 없던 일이었다. 전국적으로 생난리가 났다.
출처 : 로드넷
글쓴이 : 飛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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