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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허시명의 우리술 기행]百花酒

그린테트라 2008. 10. 3. 22:45
[허시명의 우리술 기행]百花酒
100가지 꽃과 약초로 발효시킨 조선의 精神
사진 권태균(
photocivic@joins.com
 
백화주를 빚기 위해 준비한 마른 꽃들. 바싹 마른 후에도 모양과 색깔이 그대로 남아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
솔직히 고백하건대, 전통술을 맛보러 다니면서 풍족함보다 허전함을 더 많이 느낀다. 술맛이 없거나 술안주가 부족해서가 아니고, 대작할 사람이 없어서도 아니다. 문화재나 명인으로 지정된 좋은 전통술이 있건만, 그 술과 동행해야 할 문화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술은 한 시대의 문화 상징물이다. 그래서 ‘술’이라는 말과 함께 떠오르는 저마다의 공간과 분위기와 기분이 있을 것이다. 재즈가 흘러나오는 바든 왁자지껄한 생맥주집이든 닭똥집이 앞에 놓인 포장마차든 연상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 분위기와 함께 술의 종류도 달라진다. 그런데 전통술은 어떤 분위기 속에서 마시는 것일까.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백자 주병과 문어 안주가 놓인 개다리소반의 모습일까. 이것은 드라마 속에서나 보았던 장면이지 현실의 장면은 아닌 것 같다. 고작해야 제주(祭酒)를 올리거나 명절 선물용으로 구매하는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일제 식민지와 전쟁기를 거치고 서구 자본주의가 이식되면서 우리 전통문화가 한꺼번에 쓸려나가버리면서 생겨난 낯선 풍속도다.

세상은 세월 따라 변해 가는 것이니 과거를 돌이키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타임머신이 있어서 그 옛날로 돌아가 술 한잔 하고 오면 몰라도….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을 다녀왔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열흘 전에 경험했다. 그곳을 떠나온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마치 100년은 멀어져 버린 것처럼 어리벙벙하다. 생각할수록 그곳에서 보낸 2박3일의 일이 헛꿈 같고, 궤도를 이탈하고 내게 달려든 전생의 기억 같다.

100가지 약재가 들어가는 ‘백초주’

이제 다시 그곳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그곳은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대석마을에 있는 학성강당(學聖講堂)이다.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는 개인 서당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에 주심포 팔작지붕을 인 한옥이 웅장하게 서 있다. 그곳에서는 간간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선생은 상투를 틀고 치포관에 한복을 입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학생들도 한복차림이다. 조선시대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바로 그 모습이다. 방학 때면 100여 명의 학생이 드나들고, 방학이 끝나면 20명 정도가 상주하면서 배운다. 학비는 무료다. 돈이 연관되는 순간 스승과 제자 관계는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옛날 서당에서도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먹고 입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해결한다.

선생은 화석 김수연(78) 옹이다. 기호학파의 맥을 이었는데 서암 김희진·양재 권순명을 거쳐 조선말의 유학자 간재 전 우 선생으로 학맥이 올라가고, 더 멀리로는 우암 송시열과 율곡 이이까지 올라간다. 조선 성리학의 형식과 내용을 옹골차게 지켜내고 있는 서당이자 살림집이다. 가르치는 일은 화석 옹이 주관하고, 서당 살림은 그의 막내아들 김종회(40) 씨가 도맡아 한다.

학성강당에 찾아갔을 때는 백초주(百草酒)에 100가지 꽃을 담기 전날이었다. 이름하여 백화주(百花酒)에 마지막 손질을 하기 직전이었다.

화석 옹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랑방으로 물러나자 주안상이 나왔다. 소반 위에 자기로 된 술주전자가 놓이고 안주로는 곶감과 엿 그리고 배가 놓여 있다. 달디단 안주뿐이다. 일부러 나는 안주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단것뿐만 아니라 안주를 먼저 먹으면 술맛이 흐트러진다.

종회 씨가 술을 따라 준다. 술빛은 짙은 갈색인데 탁하지는 않다. 13도쯤 될까, 도수에 비해 진하다. 술맛이 자극적이지는 않은데, 뒷맛이 쌉싸름하고 누룩내는 전혀 나지 않는다.

“무슨 술입니까.”
술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빚은 지 60일 된 백초주지요.”

석 잔을 마시자 알콜 기운이 몸을 감쌌다. 다시 한 잔을 더 들이키는데, 입속의 술이 무거워지고 술 기운은 옅어진다. 혀 깊숙이 쓴맛이 돈다. 잠깐 혼란스럽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보약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는 것 같다. 잔을 입술에 댄 채 술을 들여다본다. 약이었다면 사뭇 긴장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단숨에 들이켰을 것이다. 그런데 술이지 않은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몸에 좋다는 100가지 약초의 성분이 들어있다는데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 다시 기꺼이 빈 잔을 내밀어 술을 받고 구멍이 송송 뚫린 엿을 집어든다.

100가지 약재가 들어가는 백초주, 거기에 다시 100가지 꽃을 넣는 백초화주(百草花酒-줄여서 백화주라고도 부른다)는 종회 씨 집안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가양주(家釀酒)다.
종회 씨의 13대조(代祖)인 김호의(金好義) 어른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유훈으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문을 끊지 말 것이며, 높은 벼슬에 오르지 말 것이며, 큰 부자가 되지 말 것이며, 문집을 만들지 말 것이며, 매년 섣달에 백화주·백초주 중 한 가지를 빚어 제사와 손님 받들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승보’(家乘譜)와 ‘경주김씨세보’에 남겨놓았다. 가깝게는 종회 씨의 증조부인 김창용(金昌龍) 어른이 술을 잘 빚었고, 할머니인 무송유(茂松庾) 씨와 어머니 강릉 유씨를 거쳐 종회 씨에게로 술 빚는 솜씨가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꼭 집안의 여자들에게로만 술이 전승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종회 씨는 “사내 녀석은 고추 떨어진다고 부엌에는 범접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도 어머니가 술을 빚을 때면 따라다니면서 도와드리다 보니 술을 배우게 됐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을 들어보면 종회 씨의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출발한 것 같지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술을 대하는 집안의 분위기였다. 집안에서는 ‘주자(酒者)는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며 술을 의술의 한 영역으로 여겨 사내에게 전수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특별히 그의 집안에 전해오는 관행으로는 60세가 넘으면 술을 빚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회 씨의 어머니는 회갑을 넘기면서부터, 술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종회 씨에게 떠맡겼다. 술은 정신 기운으로 빚어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사람이 풀기가 없어지고 술을 빚어도 신령이 깃들지 않아 술을 망치게 된다며, 할머니도 그랬고 증조부도 그랬고 환갑이 지나서는 손을 뗐다고 한다.

술은 나이 들수록 더 잘 빚고, 술 빚는 것도 더 잘 어울리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보다. 그렇다면 이 화려하고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백화주는 어떻게 담는 것일까.

백화주를 완성하려면 적어도 85일이 필요하다. 우선 찹쌀 서 되와 누룩 서 되 분량으로 밑술을 만든다. 소위 주모(酒母)라고 부르는데, 발효균을 집중적으로 배양한 액체다. 발효되는 데는 5~7일이 걸린다. 소량의 주모를 빚는 이유는, 그 다음에 대량으로 투입되는 재료를 망치지 않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주모에 1차 겹술(통상 덧술이라고 하는데, 종회 씨 집안에서는 겹술이라고 부른다)이 들어가는데, 찹쌀 고두밥 7말과 잘 빻은 누룩 5말을 비벼 술독에 넣는다.

그런데 술을 빚을 때 쓰는 물이 특별하다. 100가지 약초를 구해 바짝 말린 뒤 이를 가마솥에 넣고 맑은 샘물을 붓고 10시간 가량 끓인 물이다. 이때 극독약이라고 하는 초오(草烏)·부자(附子)·상륙(商陸)·대황(大黃)을 한의사들이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인 한 움큼씩 넣고 달인다. 예컨대 초오를 달여 먹으면 혀와 온몸이 오그라들면서 죽고, 부자탕을 먹으면 목에서 피를 토하고 모든 혈관이 터져 죽는다.

그런데도 종회 씨가 극독약을 피하지 않는 것은 “상생상극의 조화를 이루도록 약재의 음양오행과 사유(四維-補陽·補陰·補血·補氣를 이름)를 조화시키면 약효를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백초를 달인 물은 탕약이나 다름없는데, 진한 검은색을 띠고 맛은 지독히 써서 혀를 대기 겁날 정도다.

‘꽃도둑질’까지 해서 따는 100가지 꽃

이 약재 곤 물로 고두밥을 지을 때, 고두밥과 누룩을 비빌 때, 술국을 잡을 때 사용한다. 즉, 백화주를 빚을 때는 맹물이 한 방울도 안 들어가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1차 겹술 때 누룩을 많이 쓴다. 약재 기운에 눌려 발효가 쉽지 않기 때문인데, 그 양이 보통 술의 두 배쯤 된다. 이때 발효를 촉진시키기 위해 엿기름을 서 되 가량 넣어준다. 그런데도 발효된 술에서는 누룩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다.

1차 겹술을 담고 20일 동안 발효시키고 나서 용수를 박아 술을 다른 항아리로 떠낸다. 그리고 나서 2차 겹술을 하는데, 1차 겹술에 찹쌀 고두밥 2말과 누룩 2되를 비벼넣는다. 이때는 술이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누룩의 양을 적게 해도 된다.

2차 겹술을 20일 동안 발효시키고 나서 또 다시 3차 겹술을 한다. 이때는 굳이 술을 다른 항아리로 떠낼 필요가 없다. 술지게미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2차 때처럼 찹쌀 고두밥 2말과 누룩 2되를 비벼 넣는다. 그 술 또한 20일을 발효시킨다. 사랑방에서 내가 맛본 술이 바로 3차 겹술 완성품이었다. 아직 백화가 들어가지 않았으니 백초주인 셈이다.

이튿날 안채의 서가에 잘 모셔놓은 우람한 두 개의 항아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한 개의 항아리에는 용수가 박혀 있었다. 용수 주변으로 1차 겹술을 떠내고 남은 지게미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 옆 항아리에는 3차 겹술 완성품이 담겨 있었다. 술항아리가 약간 이지러진 듯한데, 종회 씨 집안에서 술이 가장 잘 되는 항아리라고 했다. 100년은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항아리 안쪽에 잿물을 바르지 않아 통기성(通氣性)이 좋아 술이 잘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3차 겹술에 100가지 꽃을 담으면 된다. 종회 씨가 잘 말려 비닐 봉지에 담아놓은 꽃들을 마루로 내왔다. 마른 꽃을 한 줌씩 대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백초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만 백화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했다. 약초는 살 수 있지만 꽃은 살 수도 없어 때맞춰 따야 한다는 것이다. 꽃 따는 일을 도맡아 한 이는 7년째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는 총무 박 근(34세)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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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근 씨가 봉지에 적힌 꽃 이름을 보여주며 꽃을 딸 때 힘들었던 얘기를 꺼내놓는다.
“모란·등꽃·절굿대꽃·패랭이꽃·때죽나무꽃, 도장나무꽃·산딸기나무꽃·백굴채·자운영·흰철쭉·댑싸리꽃·수국·인삼·층층나무꽃·갓꽃·후박꽃·아카시꽃·민들레·당귀·철쭉·병꽃·고들빼기·찔레꽃·장미·토끼풀꽃·작약·꽃잔디…. 이 꽃잔디는 꽃이 작아 말려 놓고 한번 기침하면 다 날아가 버릴 정도여서 아주 많이 아주 오래도록 따야 했습니다. 수영꽃·동백꽃·박태기꽃·자목련·벽오동꽃·사상자꽃·백일홍·연꽃·석류꽃·쥐똥나무꽃·돌미나리꽃·붓꽃·개쑥꽃·사계화·이탈리안수수·개망초·냉이꽃·금은화·따꽃·접시꽃·감꽃·엉겅퀴·줄풀이꽃·구슬꽃·단풍나무꽃·싸랑부리꽃·구절초·싸리대꽃·초록꽃·밤꽃·돈나물꽃·쑥갓꽃·감국·해당화…. 해당화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울타리 넘어로 꽃도둑질을 했습니다. 하루는 거동을 수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이 저를 에워싸더군요. 뭐, 사정을 털어놓고 풀려났죠. 명아주꽃·팽이채꽃·담배꽃·질경이·널러초·행운나무꽃·코스모스·고삼·머루·삐삐·해바라기·상륙·당근꽃·무궁화·홍화·도라지·노나무·마타리·능소화, 삼백초·각시풀꽃·엄나무·남천·서광·목백일홍·사철나무꽃, 옥수수꽃·봉숭아꽃·맥문동·부들·족두리꽃·키다리꽃·개나리·원추리·회화나무꽃·두릅나무꽃·참나리·제피나무·달맞이꽃…. 달맞이꽃은 여름이면 쉽게 볼 수 있고 채취하기도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말려놓으면 깨알처럼 작아져 버립니다. 이 또한 많이 따지 않으면 안 되는 품종입니다.”

집안의 유전적 기질까지 치유하는 가양주

김제 들판에 무슨 꽃이 피는지 궁금해서 100가지 꽃을 낱낱이 구경해 보았다. 꽃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이 꽃을 찾아 산과 들을 쏘다녀야 하고, 그것도 한두 송이 꺾어서는 안 된다. 또 한창 보기 좋을 때 따야 하니 남의 눈치까지 보여 무던히 애를 먹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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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회 씨는 대가족이 모여 살 때는 백화주를 빚는 것이 크게 번잡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니 백화주가 온전히 보존되어 오는 것 자체가 신통하다. 그만큼 종회 씨 집안의 탄탄한 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율곡에서 시작된 기호학파의 맥을 이어받아 유학으로 땅에 떨어진 도를 일으켜 세우고, 유학으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정신이 아니었더라면 백화주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와 다름없는 문화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술도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회 씨는 백화주가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 더 꼽는다.
“가양주는 한 집안에서 우연히 빚게 된 술이 아닙니다. 한 집안에서 먼저 눈을 뜬 사람이 어떤 술을 가양주로 삼고, 그 술을 대물림하거나 대대로 빚으라고 한 거죠. 유전학적으로 한 집에 부족한 요소는 자손대대로 이어집니다. 술은 기혈 순환이 잘 되게 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입니다. 그러니 대개의 가양주는 유전학적으로 그 집안의 부족한 요소를 보충해 주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보입니다. 고승들이 고산병을 치유하기 위해 술을 빚어 곡차로 마셨던 것과 같은 이치지요.”

종회 씨의 견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가양주는 단순하게 한 집안에 머무르는 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집안의 약한 유전적 기질을 치유하는 처방이자 건강보조식품이라는 추론이다. 이 추론에 근거하자 왜 어른들께 드리는 술을 약주라 했으며, 가양주로 전해오는 많은 술들에 약재가 들어 있으며, 우리 술들에 그토록 많은 약술이 존재하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선시대를 이끈 핵심 공동체는 혈연으로 구성된 ‘한 집안’이었다. 그 집안에서 빚었던 숱한 술 속에 마치 어느 날 김치 속에 고추가 들어가면서 대세를 장악했듯 약재가 들어가 대세를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회 씨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때문에 술도 체질에 맞는 사상주(四象酒)를 마셔야 합니다. 같은 술기운을 느껴도 내 몸에 맞는 것이라야 합니다. 앞으로 술은 그런 쪽으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실제로 이제마의 사상의학에 바탕을 둔 사상주를 빚어 보았다고 한다. 태음이든 소양이든 체질에 맞는 약재를 달여 넣어 술을 빚으면 그게 사상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백화주는 종회 씨 집안에서만 빚었던 술은 아니다. ‘동의보감’ ‘음식디미방’ ‘증보산림경제’ ‘임원십육지’에 등장하고, 빙허각 이씨가 1810년경에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백화주 빚는 법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 첫 대목을 보면 ‘겨울에 매화·동백으로부터 이듬해 가을 국화까지 꽃을 모으되 송이째 꽃술 없이 하지 말고 그늘에 말려 각각 봉지를 지었다가 중양(음력 9월9일)에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기에 이르러 술을 빚으라.

다른 꽃은 비록 향기 많다가도 마르면 향내가 가시나, 국화는 마른 후 더욱 향기로우니 주장을 삼고 복사·살구·매화·연꽃 등과 초화(草花)에는 구기·냉이꽃 등 성미가 유익한 것은 돈수를 넉넉히 하고 다른 꽃은 각 한 돈씩 하되 왜철쭉·옥잠화·싸리꽃은 지독하니 넣지 말라”고 했다.

‘규합총서’에는 꽃 100가지를 꼭 맞춰 넣으라는 구절은 없다. 다만 모든 계절의 꽃을 다 넣으라는 뜻으로 ‘백화’를 썼을 수 있다. 그런데 ‘규합총서’의 백화주와 학성강당의 백화주에는 차이가 있다. 우선 ‘규합총서’에는 독성이 있는 꽃은 넣지 말라고 했으나 종회 씨는 “경험상 아무 상관이 없다. 꽃 종류에 상관하지 않고 100가지를 채운다”고 했다. ‘규합총서’는 또 백초를 달여 넣지도 않는다. 다만 “크고 묵은 구기자 뿌리나 소나무 마디를 진하게 달여 술 빚을 물로 쓰면 더욱 유익하다”고 했다.

이제 다시 술 빚기로 돌아가, 말린 백화를 3차 겹술한 술항아리에 쏟아부으니 꽃잎에 덮여 술이 보이지 않았다. 항아리를 덮고 20일을 더 숙성시키면 백화주가 완성된다. 꽃은 술을 발효시키지는 않는다. 꽃 속에 들어 있는 향기와 정성이 술을 깊게 만들어줄 뿐이다.

이렇게 까다롭게, 호사스럽게 만든 술이니 ‘최고의 술’이라는 찬사가 붙어 다닌다. 종회 씨는 이 술이 죽은 부모도 살려낸다고 하여 일명 효자주(孝子酒)라고 부르며, 천하의 3대 명주로 꼽는다고 했다.

‘천하의 3대 명주?’ 종회 씨의 그 말에 나는 다시금 놀란다. ‘세상에 그런 술이 있었어?’ 나는 흰 한복을 입은 종회 씨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데, 그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선비 같다. 그는 정규교육과정에 충실하게 살아온 내 삶과 지극히 상반된 삶을 살아왔다.

그는 만경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는 다니기 싫다고 해서 안 다녔다. 아버지는 잘 됐다며 내버려 두었고, 어머니는 세상 부끄럽다며 학교에 다니라고 종용했다. 검정고시를 봐서 원광대 법대와 성균관대 대학원 유교경전학과를 다녔지만 성실하지는 못했다. 그는 인생과 학문의 스승을 찾고 있었지만, 선생들은 한결같이 남의 이론과 학설만 전달할 뿐이었다.

그는 학교 다닐 시간에 세상을 주유하고 다녔고, 그 세월이 15년에 이른다. 지리에 밝아 풍수 선생을 10명 이상 모셨고, 도선의 풍수를 이해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의학은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약재와 약초에 관심이 많아 가까운 사람들에게 처방전을 써줄 정도는 된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위암에 걸려 치료 불가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세상 좋다는 약을 다 처방하여 어머니의 위암을 완치시키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을 ‘나를 버리고 우리를 위하는 학문’이라고 했고, 성리학을 통해 이 사회의 건강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3대 명주’ 중 하나

그렇다면 도대체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천하의 3대 명주가 무엇인가. 그는 첫번째가 백화주, 두번째가 송화대력주, 세번째가 불로주라고 했다. 나는 다시 종회 씨에게 바짝 다가앉으면 묻는다.

“송화대력주는 뭐고 불로주는 뭡니까. 도대체 어떻게 빚는 술입니까.”
종회 씨는 서슴없이 전설 같은 얘기를 털어놓는다.
송화대력주(松花大力酒)를 빚으려면 닭 울음소리가 안 들리는 곳에서 100년 이상 된 만리풍송을 찾아야 한다. 높다란 절벽 위의 솔수펑이에서 가장 키가 큰 적송을 골라내야 한다. 소나무를 찾으면 땅밑을 파고 들어가 줄기 반대 방향으로 곧게 뻗어내려간 뿌리를 찾아낸다.

그 뿌리 끝을 쌀 한 가마니 정도 들어갈 큰 항아리에 넣는데, 이때 곧은 뿌리가 항아리 바닥에서 한 자 정도 떨어지게 자른다. 그 항아리에 고두밥과 누룩을 넣어 잘 비벼준 뒤 흙이나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기름 먹인 한지로 꽉 동여매고 흙을 덮는다. 땅속 항아리에서 술이 익게 되고, 소나무는 그 술을 먹게 된다. 소나무는 술을 빨아올렸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소나무의 향과 기운과 자양분이 술 속에 녹아들게 된다.

그러다 마침내 소나무가 술독으로 죽게 되는데, 소나무가 죽고 나서 석 달 뒤에 항아리를 파낸다. 너무 일찍 항아리를 파내면 소나무가 술을 채 토해내지 못해 술이 하나도 없는 수가 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술이 송화대력주다.

불로주(不老酒) 역시 산중에서만 빚을 수 있는 술이다. 짐승이 잘 다니는 길목에 항아리를 땅 위로 한 자 반 정도 올라오게 묻는다. 이때 뚜껑을 덮지 말고 바람이나 짐승이 항아리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되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공간을 약간 띄워 지붕을 만들어 준다. 술이 익으면 향내가 풍기기 시작한다.

산 속의 곤충이나 짐승도 술을 좋아해서 술독으로 몰려든다. 특히 뱀이 술을 좋아한다. 술맛을 보려고 온갖 생물들이 항아리로 기어들다 빠져 죽게 된다. 술이 3분의 2쯤 들어찬 항아리에 개구리·귀뚜라미·두더지·뱀·날벌레·곤충 따위가 절반쯤 차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묶어둔 채 3년 이상 묵힌다. 그러면 맛도 좋고 죽은 사람 살릴 정도로 효과가 좋은 술이 된다. 하지만 불로주는 실패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도수가 높지 않은 발효주에 동물성이 들어가고 3년 동안 숙성시키기 때문에 술이 썩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성패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종회 씨는 송화대력주와 불로주는 빚어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전해 들은 얘기일 뿐이라고 했다. 지금은 환경파괴범이 되지 않고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니 그 술을 탐낼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나마 백화주는 꽃도둑 소리만 감내하면 빚을 수 있으니 다행스럽다.

앞으로 열흘만 더 지나면 학성강당에서는 꽃을 담가둔 백화주를 떠낸다. 술을 맛보기 위해 종회 씨의 친척과 지인들이 ‘파발을 섰다’는데, 나는 못미더워 다시 종회 씨에게 전화를 건다.

“술 떠내기 전날 꼭 전화 주세요.”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다시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까. 무선전화가 종회 씨와 나를 연결해주고 있다지만, 그곳은 100년쯤 떨어진 조선의 땅 같기 때문이다.
출처 : 로드넷
글쓴이 : 飛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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