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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남선이 꼽은 조선 3대 名酒의 하나 竹瀝膏(죽력고)

그린테트라 2008. 10. 3. 22:33
[허시명의 우리술 기행]최남선이 꼽은 조선 3대 名酒의 하나 竹瀝膏(죽력고)
“너무 오래 잊고 지내 그리움마저 잊혀진 名酒”
외부기고자 허시명(
twojobs@empal.com
 
 
죽렬고를 빚는 송명섭씨가 소줏고리에 시릇번을 붙이고 그 위를 광목천으로 감싸고 있다.
죽력고(竹瀝膏)를 만나러 태인으로 향하던 날, 공교롭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의 고택 ‘소원’(素園)이 헐렸다. ‘소원’의 기와지붕을 들어내는 인부의 사진이 일간신문에 엽서만하게 실려 있었다. 최남선은 비록 일제 말기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며 친일 행각을 했지만, 최초로 자유시를 짓고, 최초로 잡지를 펴내고, 3·1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민족 고전을 정리했던 선구자였다. 그 선구자가 앞서 길을 가다 실족하여 친일을 했지만, 친일을 이유로 그의 모든 것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의 고택 ‘소원’이 보존되어야 하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 것인데, 결국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가 죽력고를 알게 된 것은 육당 최남선 때문이다. 육당은 1946년에 펴낸 ‘조선상식문답’에서 ‘우리 나라 술의 유명한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스스로 이렇게 답했다.

‘가장 널리 퍼진 것은 평양의 감홍로(甘紅露)이니, 소주에 단맛나는 재료를 넣고 홍곡(紅穀)으로 발그레한 빛을 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주의 이강고(梨薑膏)이니, 뱃물과 생강즙과 꿀을 섞어 빚은 소주입니다. 그 다음은 전라도의 죽력고(竹瀝膏)이니, 푸른 대를 숯불 위에 얹어 뽑아낸 즙을 섞어 곤 소주입니다. 이 세 가지가 전날에 전국적으로 유명하던 것입니다.’

최남선은 조선 3대 명주(名酒)로 감홍로·이강고·죽력고를 꼽은 것이다. 지난 시절 명주 선발대회를 가진 적도 없고, 또 공공연하게 명주를 꼽아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 최남선이 나라 안을 통틀어 명주를 꼽은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술을 빚는 사람들은 자기 술이 최고라고 치고, 술을 마신 사람들이 자신이 마셔본 것 중에서 몇 가지를 좋다고 꼽은 적은 있어도 최남선처럼 공개적으로 명주를 꼽지는 않았다. 더욱이 최남선은 민속학의 권위자 아니던가. 그랬기에 나는 최남선의 발언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膏는 증류한 고급 술, 竹瀝은 대기름

최남선이 꼽은 세 가지 술 중에서 이강고는 현재 전주에서 조정형 씨가 ‘이강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이미 명인 지정을 받아 문배주·안동소주·진도홍주와 더불어 소주 4인방을 구축하고 있다. 감홍로는 평양 술이어서 기대하지 않았는데, 문배주를 빚는 이기춘 씨의 동생 이기양 씨가 농림부로부터 명인 지정을 받아 철원에서 빚으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감홍로는 상품화되지 못했다. 이기양 씨가 급작스럽게 병을 얻어 세상을 버리는 바람에 감홍로도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다. 같은 술이라 하더라도 빚는 사람에 따라 술맛이 달라지는데, 이기양 씨의 감홍로는 세상 빛을 못 보고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가 다시 감홍로를 빚을 수 있을까. 당분간 남한 땅에서는 감홍로를 찾을 길이 없을 것 같다.

세번째로 꼽힌 죽력고는 아예 종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나는 죽력고를 찾기 위해 대나무가 많은 담양을 더듬고 다녔다. 담양문화원과 죽물박물관에 연락해 죽력고 빚는 이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고 했다. 담양에서 댓잎술을 빚는 양대수 씨에게도 물었으나 마찬가지 대답이었다. 대나무 없는 동네가 두 군데뿐이라는 담양에서 죽력고가 없다면, 죽력고는 사라지고 만 것이리라. 60년 전만 해도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술이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안타깝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국순당에서 주최한 ‘아름다운 우리 술을 찾습니다’ 행사의 본선 ?사??하다 죽력고를 만나게 되었다. 맑은 쑥빛 술이 죽력고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나는 술맛도 보기 전에 그 이름만으로도 감격하고 말았다. 최남선 선생조차 시세에 밀려 없어지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했던 그 술이 바로 내 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냄새를 맡아 보니 일찍이 어떤 술에서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였다. 입 속에 술을 머금고 잠시 혀를 굴려 보고, 길게 숨을 내쉬어 보았다. 증류주인데 독하지는 않았다. 도수는 20도를 약간 넘는 정도였다. 맛 또한 익숙하지 않았다. 대나무 기운이 술 속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술을 맛보기 위해 입에 머금었던 죽력고를 뱉어내야만 했다. 그렇게 죽력고와 안타까운 첫 상봉을 했다.

그 술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죽력고가 보존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술을 망실하고 있는가. 옛 문헌에 등장하는 300종이 넘는 술 중 복원된 것은 50종이 채 못 된다. 죽력고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사람들은 죽력고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죽력고가 사라진 줄도 모른다. 그래서 죽력고가 다시 등장해도 기뻐할 줄 모른다. 무심할 뿐이다. 너무 오래도록 잊고 지내면 그리움도 사라져 버리는 법이다.

도대체 죽력고는 어떤 술인가. 고(膏)는 한방에서 오래 달여 진득진득해진 상태를 말한다. 경옥고나 고약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술쪽에서 ‘고’는 증류한 고급 술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보면, 죽력고는 1766년 유중림이 쓴 ‘증보산림경제’, 1827년 서유구가 쓴 ‘임원십육지’에 등장한다. 주로 대나무가 많은 전라도 지방에서 빚은 고급 소주로, 중풍으로 신체가 마비될 때 약으로도 썼다고 전한다. 술의 발달 과정으로 보았을 때, 죽력고는 가장 정교하고 복잡해진 단계에서 탄생한 술이다.

죽력고를 내리기 위해서는 우선 밑술과 죽력(竹瀝)을 준비해야 한다. 모든 증류주는 밑술이 있어야 하는데, 밑술은 효모균이 살아 있는 발효주이고, 10도대의 저도주다. 밑술은 곧 청주인 셈인데, 그냥 마셔도 된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소주가 유행하자 양곡의 소비를 한탄하면서 전국에 있는 소줏고리를 거둬들이자고 조정에 청원하기도 했다.

죽력은 흔히 대기름이라고도 부른다. 대나무를 고아 뽑은 기름이기 때문이다. 대나무를 그냥 솥에 넣고 쪄도 대기름은 나오지만, 그래서는 효험 있는 죽력을 얻을 수 없다. 죽력을 제대로 내리려면 항아리와 자배기를 준비해야 한다. 이때 항아리와 자배기의 주둥이 크기가 같아야 한다. 자배기는 땅속에 묻고 항아리에는 마디를 제거한 대나무 토막을 넣고 뒤집어도 쏟아지지 않게 잰다. 그 다음 자배기 주둥이에 항아리 주둥이를 맞춰 뒤집어 세운다. 마주 댄 주둥이는 시룻번을 하듯 황토로 바른다. 그러고는 항아리를 왕겨로 수북이 덮어 무덤처럼 만든다. 왕겨 밑에 마른 콩잎을 넣고 불을 지핀다. 왕겨의 지긋한 불기운으로 사흘 동안 항아리 속의 대나무를 고면 땅속 자배기에 대나무 진액이 고이게 된다. 그 진액이 죽력이다. 죽력은 요즘도 한의원에서 약재로 사용하는데, 죽창처럼 막힌 것을 뚫는 기능을 한다. 주로 심장병이나 협심증 등의 성인병에 많이 처방하는데, 드물게는 타박상을 입어 어혈이 생길 때도 사용한다. 이렇게 청주와 죽력을 준비해야만 죽력고를 만들 수 있다.

그 다음은 죽력고를 빚는 송명섭 씨의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다. 송명섭 씨는 전라북도 태인에 산다. 그는 대형트럭 운전사다. 올해 47살. 술을 빚는 이 치고는 젊다. 게다가 남자라는 점도 특별하다. 전통술 기능은 여자들이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술이라는 것이 부엌에서 음식의 한 가지로 빚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사업화되면서 남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때문에 남자들이 눈에 많이 띌 뿐이다.

竹瀝膏 빚는 남자 송명섭, 술과의 인연 30년

태인은 오래 된 동네다. 일제시대때 호남선 철로가 태인을 관통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 센 유림들은 철마의 횡단을 거부했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다리 두 개를 새로 놓고 “다리 두 개를 건너서는 태인 땅이 아니니 철로를 놓게 해주십시오” 하고 사정한 끝에 호남선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생긴 동네가 신태인이다. 지금은 신태인에 견주면 태인은 잔잔하고 한적한 동네다.

img2R호남선과 함께 생긴 두다리목을 지나 태인 읍내에 들어서면 나무 기둥 28개가 팔작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披香亭)이 나온다. 정자 뒤쪽으로 연못이 있는데, 연꽃이 피면 그 향기가 주위에 가득하기 때문에 피향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기 887년 신라 정강왕 1년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 마을 (태산) 군수로 있을 적에 이 연못가를 거닐었다고 한다. 태인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30세의 최치원이 첫번째 부임한 외직 근무처로, 최치원의 절망과 고뇌가 서린 곳이다. 최치원이 피향정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 오는데, 현재의 건물은 1716년 현감 유 근이 세운 것이다.

피향정에 오르면 태인 읍내가 다 보인다. 높은 건물이라야 교회 첨탑과 산 밑에 들어선 모텔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개발 바람이 신태인쪽으로 몰려가 태인은 조용하다. 하지만 태인에는 체통 있는 마을 어른들이 모인 노휴제(老休齊)가 있고, 태인향교가 있고, 시정(詩亭)이 있다. 군수가 부임하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노휴제라고 한다. 노휴제 어른들은 방안에 앉은 채 마당에 선 신임 군수로부터 인사를 받을 정도로 굳세고 도도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 어른들도 많이 줄어 예전 같지 않다.

송명섭 씨는 피향정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그의 집 마당에 들어서니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댄다. 귀가 늘어진 사냥개는 철망 안에서 짖고, 진돗개 백구는 쇠줄에 매인 채 짖는다. 집 안쪽에서 얼룩덜룩한 호구(虎狗)와 바둑이가 덩달아 짖는다. 마당에는 장독대가 있어 장독들이 단체사진이라도 찍으려는 듯 키순으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장독대 뒤로는 낡은 2층 시멘트 건물이 있는데, 유리창은 깨지고, 외벽 페인트칠은 벗겨져 주인이 피난 가고 없는 집 같다.

죽력고 내리는 것을 보기 위해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주술박물관 관장인 다음(茶音) 씨와 관원 유상우 씨였다. 그들도 죽력고를 찾다 내게 연락이 닿아 합류한 것이다. 전주술박물관은 지난해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전주시에서 조성한 박물관이다. 전주 풍남동 한옥마을에 있는데, 공공기관에서 마련한 최초의 술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술을 빚는 과정과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고, 술도 빚어 저장하고, 술에 관련된 교양강좌도 운영하고 있다.
송명섭 씨가 우리를 방안으로 안내했다. 안주인이 “무슨 차를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차는 무슨 차요? 술을 주십시오.”
대뜸 내가 말했다. 차를 마시면서 뜸을 들일 게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기다려 왔던 죽력고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청했다. 송명섭 씨가 배추 두 통은 족히 들어갈 만한 플라스틱 통에 술을 잔뜩 담아 왔다. 죽력고가 아니었다. 빚어놓은 죽력고는 친구들이 몰려와 다 마셔 버렸고, 죽력고를 내리기 위한 밑술뿐이라고 했다. 그는 밑술도 아주 맛있다고 했다. 주인이 권하는데 손이 어찌 마다하겠는가. 밥공기에 술이 가득 채워졌다. 연노란 술빛이 마치 보름달을 보는 것처럼 곱다. 한 잔 마셔 보니, 엷게 쓴맛이 돈다. 전통 청주는 단맛이 많이 도는 것이 특징인데, 송명섭 씨의 술은 달지 않다.

“단맛이 안 돕니다.”
내가 물었다.
“왜 돌아요?”
송명섭 씨가 덤덤하게 반문했다. 단맛이 돌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밑술을 뭘로 담급니까.”
“쌀과 누룩으로요.”
그런데도 단맛이 돌지 않다니, 신통해 하는 나를 향해 송명섭 씨가 말했다.

“술을 잘 담그면 단맛보다 쓴맛이 돕니다. 제 술은 뒤에 약간 쓴맛이 돌 겁니다.”
자신있는 그의 말에서 술에 대한 공력이 느껴졌다. 밑술을 담근 지 20일이 됐다고 했다. 누룩의 잡내도 없다. 아주 깔끔하게 목을 넘어간다. 도수는 제법 높다. 술박물관 관장인 다음 씨와 나는 술 도수를 14도로 어림잡았다. 하지만 술잔을 거푸 기울이다 보니 1∼2도 정도는 더 높게 잡아줘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밑술맛에 탄복하면서 술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권주가(勸酒歌)가 탈이었다. 송명섭 씨가 권주가로 가곡 ‘명태’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아아” 하는 탄성이 최고라고 했다. 술은 그렇게 마셔야 한다는 것이 송명섭 씨의 지론이었고, 우리는 그의 말대로 호기롭게 ‘카아아’ 소리를 내면서 공기 술잔을 비워댔다. 취기가 급속하게 몰려왔다. 저마다 목소리들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음 씨가 진짜 권주가를 부르겠다고 했다.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한 그는 10대때 절에서 배웠다는 범패를 부르기 시작했다.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목청만으로 실오라기를 뽑듯 소리를 길게 뽑았다. 범패에는 추임새를 하는 게 아니라는데도 유상우 씨는 “얼씨구” “조호타” 소리를 연발했다. 서로들 결코 취하지 않았다면서 술을 더 내오라고 소리지르도록 술판이 이어졌다. 그렇게 4시간쯤 술을 마셨을까.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오후 3시였다. 지금 점심을 먹지 못한다면 평생 오늘 점심을 찾아 먹을 수 없게 된다며 송명섭 씨는 우리를 매운탕집으로 이끌었다.

중풍 치료약으로 쓰였던 죽력고

나는 식당에서 밥공기를 반쯤 비우다 혼절하듯 식당 방에 쓰러지고 말았다. 숙취(宿醉)였다. 취하면 자는 버릇이 있는 나로서는 비록 숟가락을 들고 있었지만 밀려오는 잠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내 주량을 넘어선 것이었다. 내 배는 마치 한껏 불어댄 풍선이 되어 있고, 이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수마(睡魔)에 짓눌리면서, 얼핏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잠에서 깬 것은 저녁 9시였다. 전주술박물관 사람들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냉수를 한 잔 마시고 나서야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송명섭 씨가 물었다.
“어떠십니까.”
그는 내 몸 상태보다 술 마시고 난 뒤끝을 묻고 있었다.
“괜찮은데요.”
우려했던 두통도 복통도 없었다. 신통하게도 술기운조차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맑은 하늘 아래 서 있는 것 같았다.

img4R“죽력고는 모여 앉아 밤새도록 먹어도 기분이 좋아요. 아무리 많이 마셔도 일정 정도 이상은 취하지 않아요. 몸속의 노폐물이 다 빠져나온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사우나를 한 것처럼 몸이 개운해요.”
송명섭 씨는 죽력고를 두고 믿기 어려운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과음했는데도 사우나를 한 것처럼 개운해지다니! 그게 어디 술이던가. 약이라면 모를까. 의심스러웠지만 밤늦도록 송명섭 씨의 가계사(家系史)를 들으면서 나는 죽력고가 충분히 약일 수 있고 약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생각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송명섭 씨는 현재 대형트럭을 운전하고 있지만, 그의 아내는 술도가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집은 간판도 내걸지 않았지만 태인막걸리 양조장이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허름한 시멘트 2층 건물이 양조장이고, 마당의 장독들은 한 시절 술도가 일에 가담했던 도구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송영승 씨가 일제 시대부터 술도가를 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최고 재력가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내려 번 돈으로 공민학교를 세워 무료로 학교를 운영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자리보전하게 된 뒤 송명섭 씨는 열 여덟살 나이에 술도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송명섭 씨의 술 이력은 이미 30년에 이른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 막걸리의 수요가 줄고 농촌 인구도 줄면서 양조장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금은 판매량을 밝히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여서 아내가 부업삼아 술도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좀더 나은 벌이를 위해 대형트럭을 운전하고 있다.

송명섭 씨는 죽력고 내리는 법을 어머니 은계정(1917∼88) 씨에게 배웠다. 어머니 일을 돕다 저절로 습득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치료약으로 죽력고를 내렸다. 술도가라서 밀주 단속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친정 할아버지로부터 죽력고 기술을 배웠다. 친정 할아버지 은재송(1864∼1945) 씨는 전라북도 고부에서 한약방을 운영했다. 은재송 씨는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술의 비방을 모아 직접 술을 빚어 치료 보조제로 사용했다. 밀주 단속이 심하던 일제 시대에 약으로 쓰겠다는 명분으로 단속을 피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친정 할아버지로부터 몸에 좋은 죽력고·호마주·복분자술·연엽주 따위의 비방을 이어받았고, 송명섭 씨는 어머니로부터 그 기술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가 알고 있는 복분자술은 누룩으로 빚는 전통 방식이었고, 연엽주는 아산 외암리 연엽주와 달리 증류주였으며, 호마주는 검정깨가 들어가는 증류주였다. 한결같이 잊혀지거나 재현되지 않고 있는 전통 술들이었다. 죽력고와 함께 이 술들은 일제 시대에는 한약방에, 해방 뒤에는 술도가에 몸을 숨기면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그나마 송명섭 씨의 아버지가 중풍을 앓지 않았다면 이 술들은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비용도 많이 들고 빚기도 까다로운 술

이튿날, 송명섭 씨와 나는 죽력 항아리를 살피러 갔다. 들판 한가운데 빈 축사 옆에 죽력 항아리가 검은 잿더미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3일 전에 불을 지펴 놓았는데 왕겨 10가마니 분량이 반 가마니 정도의 재로 변해 있었다. 재를 파내니 땅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윗 항아리를 들어내는데, 항아리 속에서 숯으로 변한 대나무들이 쏟아졌다.

“아이쿠!”
송명섭 씨가 탄식했다. 땅속에 묻은 자배기에 죽력은 담겨 있지 않았다. 죽력을 내리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죽력은 좋은 날을 골라 내려야 하는데 이틀 동안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면서 왕겨의 불길을 미치게 해버린 것이었다. 은근한 불길로 꼬박 이틀 밤낮과 한나절 동안 대나무를 고아야 하는데, 너무 뜨거운 불기운이 항아리를 달구고 대나무를 숯으로 만들고 죽력을 증발시켜버린 것이다.

새로 죽력을 내리려면 사흘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한데, 당장 술맛은 봐야겠기에 비상수단을 쓰기로 했다. 전주의 한약상에 가서 죽력을 사기로 했다. 음료수병 1.8ℓ에 든 죽력이 14만원이었다. 비쌌지만, 1.5ℓ에 28만원 하는 것도 있다는 마당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송명섭 씨는 그 죽력 맛이, 자신이 직접 내린 죽력 맛과 다르다고 했다. 덜 달고, 덜 쓰고, 덜 아릿하다는 것이다.

하여튼 죽력고는 비용도 많이 들고 빚기도 까다로운 술이었다. 20일이 걸려 밑술을 빚고, 사흘을 지켜서서 죽력을 내리고서야 비로소 소줏고리를 얹어 죽력고를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준비할 게 더 있다. 댓잎, 대나무숯 그리고 마디를 잘라낸 대나무와 솔잎과 생강이 필요하다. 소줏고리를 뒤집어 엎고 그 안에 이 재료들을 차곡차곡 쟁여 넣어야 한다.

우선 댓잎을 소줏고리에 넣는다. 이때 죽력을 사용하는데, 죽력을 뿌려 댓잎을 잰다. 그 다음 마디 없는 대나무, 솔잎, 대나무숯을 차례로 넣는다. 생강은 소줏고리 주둥이에 박아넣는데, 생강을 넣어야 경혈에 닿아 약성이 좋아진다. 재료가 소줏고리에 절반 가량 차게 넣은 다음 광목천으로 덮고 대나무 잔가지를 촘촘히 가로질러 뒤집어도 쏟아지지 않게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소줏고리를 뒤집어 청주가 든 솥 위에 얹는다. 불은 약한 불로 오래도록 지피는데, 죽력고를 내리는 데 6시간 가량 걸린다.

밑술 50ℓ를 솥에 붓고 죽력고 14ℓ를 얻었다. 술은 40도 가까이 높게 내려졌다. 연하고 투명한 쑥빛이 황홀하다. 댓잎을 우려낸 것 같다. 담양의 댓잎술에서 보았던 에머럴드 색이다. 코끝을 가까이 대 본다. 알콜 향이 강렬한데, 그 사이로 죽력고 특유의 향이 뭉쳐 있다. 향신료라도 넣은 것 같다. 쇳내 같고 잿내 같은 기운이 스며 나오는데, 결코 역겹지 않다. 묘한 매력을 지녔다. 그 향이 마치 폭풍에 휩쓸린 대숲 소리처럼 맹렬하다.

나는 대숲 바람에 휩쓸리듯 술을 들이켰다. 송명섭 씨는 자꾸 옆에서 ‘명태’의 가난한 시인처럼 ‘카아아’ 소리를 내면서 마시는 것이 제일이라며 나를 부추킨다. 나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안다. 그는 나를 아예 술독에 빠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죽력고를 잔뜩 마시고 아침에 일어나면요, 사우나를 한 것처럼 몸이 개운해요.”
세상 만물이 흔들리고, 내 머리 속에는 그 말만 웅웅거릴 때까지 나는 죽력고를 들이키고 있었다.

허시명 약력

-여행작가
-1961년 광주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샘이 깊은 물'기자, 자유기고가 활동
저서로 '문학과 역사의 현장답사기-사랑의 기억만 가지고 가라'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등이 있다.

출처 : 로드넷
글쓴이 : 飛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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