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식

[스크랩] 무릇 이야기

그린테트라 2011. 8. 31. 14:46

 

 

 

단지 건너편 옹진군청 광장에 향토시장이 열렸다. 궁금증이 도발하여 가벼운 차림으로 가보니 입구 천막에서 국수와 파전을 판다. 종사원들은 섬의 부녀자들이 동원된 것 같았다. 가판대엔 새우젓, 조개젓, 꽁치젓, 다시마, 포도, 오이엑기스, 쑥환, 메밀꿀 같은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무릇조림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 무릇인가? 기억이 빠르게 옛날로 회귀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연중 한 두 차례 무릇을 달여 조림을 만드셨다. 별미였던 기억... 한숟갈 떠먹을 때마다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번졌다. 할머니가 별도로 보관하는 것들은 모두 특별했다. 안채 뒤꼍 추녀 서까래에 새끼줄로 걸어둔 정종병도 그랬다. 오래도록 굴뚝 연기로 그을음이 새까만 병을 내려 마개를 열고 들여다보면 검붉은 꿀이 들어있었다. 그래 병을 거꾸로 들어 입에 대고 있으면 꿀이 천천히 내려와 -지루할 정도로- 다디단 향으로 미각을 마비시켰다. 무릇조림도 마찬가지다. 조림이라 하면 어패류·육류·야채 등을 간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약한 불에 오래 익혀 만든 음식을 일컫는다. 지금 말하는 무릇조림도 끈기있는 절차가 필요하다. '약한 불에 오래 익힌다'는 개념은 아궁이 앞을 지키고 앉아 적당한 화력을 지속시키는 인내가 수반돼야 한다. 한겨울도 아닌 철에 농본위주의 가정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오랜시간 불에 조려 빚은 무릇조림은 정말 맛있었다. 살살 녹는다고 해야 하나? 씹지 않아도 스스로 흘러내렸다.

 

상품을 내놓은 매장 주인에게 묻자 자월도에 자생하는 무릇을 직접 채취하여 조려 만들었단다. 두 분이 부녀지간으로 보였는데 시식을 권하여 먹으니 옛날에 먹던 그 맛 그대로였다. 아마 40년만에 먹어보는 것 같다. 조림은 젓갈통 같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1만원씩 판매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릇에 관해 모르는지 나와 낯선 오십대 중반 여인 둘뿐이었다. 즉시 딸로 보이는 젊은 여성에게 무릇조림 두 병과 무릇즙 한 병을 시켰다. 무릇즙은 커다란 음료병 크기 용기에 가득 담아 2만원씩 판매했는데 달랑 두 병 있는 것을 아까 낯선 오십대 중반 여인과 내가 각 한 병씩 구입했다. 운동복 차림이라 불알 두쪽과 현금카드만 지니고 있었는데 다행히 카드 결재가 가능했다.

 

 

* 무릇 

전국 각지에서 야생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원산지는 한국이고 대만, 중국, 우수리,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속명인 Scilla는 지중해에서 약용하던 ‘Skilla’에서 나온 말이다. 반그늘지고 약간 습윤한 곳에서 잘 자란다. 비늘줄기와 어린 잎을 간장에 조려서 엿처럼 먹으며, 구황식물()의 하나이다. 뿌리를 구충제로 사용한다.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흰무릇(for. alba)이라고 한다. 한방에서는 풀 전체를 면조아(綿棗兒)라고 하며 해독, 소종에 효능이 있다. -인터넷 지식 사이트 인용

 

 

 

횡단보도를 건너며 아내에게 전화를 걸자 무릇이란 말을 오랫만에 들어본다며 어릴때 고향에서 먹던 기억이 난단다. 경상도 점촌이나 충청도 부여나 토속적 성향과 정서의 발로는 비슷하리라. 거기서도 이른봄 소나무 껍질을 벗겨 수액을 핥아먹던 추억이 있다고 들었다. 송진을 씹으면 껌이 된다고 뜻도 없이 오물거리던 기억... 해당화 수과(瘦果)의 씨를 발라내고 꽈리를 만든다고 혀로 굴리며 다니던 기억도 난다.

 

아내의 옛날얘기 중엔 친구랑 먼길을 걷다가 트럭을 세워 조수석에 올라타고 산복도로를 넘었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건 자랑거리가 아니다. 트럭 얻어탔다가 그 길로 트럭 운전수에게 시집 가는 예가 드물지 않은 곳이 시골이었다. 운전하면서 불러주는 주소를 외웠다가 집에 가서 편지 날리고... 내 둘째이모도 이모부의 삼륜차 운전수 시절 연애로 결혼하셨는데 아마도 이모부가 청양 올라가는 새재 어디 벌목장 나무 실러 다닐 때 눈이 맞지 않았나 싶다. 가령 읍내 금성극장 방주연 쇼 구경 다녀오던 길에 삼륜차 조수석에 탔다가 주소 받고 펜팔하던 끝에 말이다. 그랬거니 이모부는 술로 간경화를 얻어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조림과 즙을 냉장고 신선실에 넣어두었다. 무릇조림은 간식으로 먹는다하니 틈틈이 꺼내어 맛을 음미할 것이다. 아까운 마음에 아직 한 입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고향집 어머니께 드리면 참 좋아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새댁시절, 별채 뒤꼍 서까래 틈에서 아랫마을 과부랑 사통(私通)하는 시아버지 연애편지를 훔쳐읽던 얘기며 화가 나면 며칠씩 입을 닫았다는 할머니 얘기도 들으며... 어머니는 당신의 시부모 얘기를 하실 때면 곧잘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웃으신다.

 

 

 

 

출처 : 등나무 집 우체통
글쓴이 : 류삿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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