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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외수 “달의 지성체들과 교감하며 집필”

그린테트라 2011. 3. 15. 09:29
2005년 8월 24일 (수) 00:16  경향신문
이외수 “달의 지성체들과 교감하며 집필”

지금부터 하는 말은 ‘믿거나 말거나’이다. 이성과 상식만 믿고 사는 사람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23일 서울 인사동에서 작가
이외수(59)를 만났다. 그는 ‘괴물’ 이후 3년 만에 장편소설 ‘장외인간’(전2권·해냄)을 내고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달에 있는 지성체들과 채널링(소통)을 하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외계인과 텔레파시를 주고 받았다는 얘기다. 여기 저기서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진지함에 모두 기가 눌렸다.

“증명할 길은 없지만 저는 그들의 존재를 믿고 있어요. 달의 지성체들과는 2년 전부터 채널링을 했으며 평소 1주일에 한번 정도 시도하는 편입니다. 처음에는 눈을 감아야만 가능했지만 지금은 눈을 뜨고도 해요. 채널링할 때는 5명의 전문가들이 동참하는 편이죠.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도 영화 만들기 전에 외계의 생명체와 채널링을 합니다.”

그들과 뭘 교감한다는 걸까. “이것 저것 물어보죠. 예를 들어 ‘지구인이 그곳 달에 진짜 착륙했는가’ ‘지구는 진짜 멸망하는가’ 하는 것들…. 아, 그들을 통해
이순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어요.”

그러잖아도 이 소설은 달이 사라졌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달이 자취를 감춘 뒤 세상에 일어나는 기이한 자연 현상들을 아래에 깔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가뜩이나 기인으로 알려진 그가 진짜 도사라도 된 걸까.

“올해로 소설 인생 30년을 맞는데, 제 작품 성향은 ‘벽오금학도’(1992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어요. 이전에는 소외받거나 방황하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주로 다뤘습니다. 그러다가 작가로서 그들에 대한 ‘구원’을 모색하기로 했지요. 10년 가까이 글을 안 쓰고 구원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장외인간’을 통해 이 시대에 절망하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방안이 뭔지, 새로운 인간형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봤다”고 말했다. “문화 전반에 걸쳐 타락 양상을 보이고, 소망보다는 욕망으로 치달아가는 요즘 세태의 병폐를 드러내고자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람들은 내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내 나름대로 굉장히 현실적인 소설이에요.”

그는 이른바 ‘대박’ 작가다. 잘 안 팔린 게 40만부, 조금 잘 팔렸다 하면 1백만부를 훌쩍 넘겼다. 출판사측에서 3년간 생활비조로 선인세(先印稅)를 줘가며 집필을 보조한 것도 그런 이유다. “이번에는 얼마나 팔릴 것 같아요?” ‘도사’에게 던질 질문은 아닌 듯했다. 순간 묘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

“아, 그것도 달의 지성체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얼마나 팔렸으면 좋겠느냐”고 되묻더군요. ‘기본적으로 이전에 팔린 것 정도는 나갈 테니 걱정마라’고 하데요.”

〈조장래기자
joy@kyunghyang.com

 

<객원기자 이산하 시인이 만난 사람>
이외수“기인아닌 글쟁이일뿐”
“문학은 魂을 쏟는 외로운 독주”
소설가 이외수는 기인도 도사도 아니었다. 인도나 티벳에 가는 초보 여행자들이 애당초 자기가 갖고 간 환상만을 보고 오듯이 이외수의 ‘기인 이미지’도 준비된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주말 춘천의 ‘명승지’인 그의 집 격외선당(格外仙堂)을 찾아 밤을 꼬박 새우며 12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주위에선 서로의 과거행적이 얼핏 ‘극과 극’으로 비치는 이외수와 필자의 첫 만남을 단명으로 점치기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필자가 보기에 이외수는 이미 안팎의 경계가 없는 예술가였다.

필자가 ‘내 명함’이라며 시집 ‘한라산’을 내미니, 그도 오늘 나온 ‘따끈따끈한’ 것이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날다 타조’(리즈앤북)라는 제목의 신작 에세이집이었다. 책 표지의 카피가 역시 이외수답다. ‘세상이 아직도 그대 하나를 끌어안지 못한다면 그대가 세상을 통째로 끌어안아 버려라’

―신작은 어떤 책인가.

“이 책에 담아놓은 16편의 사색의 조각들은 허기지고 비틀거리는 현대인들의 갈증을 적셔주기 위한 희망의 메시지들이자 거품 같은 존재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깊은 성찰이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자살자가 속출하는 이 사회가 난 너무 끔찍하고 저주스럽다.

그 고통받고 벼랑 끝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나이 60이 다 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이 책이 그들의 고단한 영혼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나 어둠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라도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독수리 같은 새에 비유하지 않고, 새이면서도 날지 못하는 타조를 간택한 것이 인상적이다.

“타조는 평균 시속 50㎞ 정도로 달리지만, 위기에 직면했을 때의 순간 속도는 80㎞가 넘는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내 독자들도 무릎과 날개를 꺾지 말고 타조처럼 하늘이 아니라 지상에서 쌩쌩 날았으면 좋겠다. 날다, 대한민국 이것이 이 책의 컨셉이다.”

―여러 인터뷰를 보니까 장편 하나 쓰기 위해 거의 3년에서 5년씩이나 걸리고 심지어 방문까지 밖에서 대못으로 박아버린다는데 엄살 아닌가.

“가장 큰 이유는 남들처럼 1~2년만에 뚝딱 쓸 수 있는 타고난 재주가 없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난 한 작품의 집필에 들어가면 정말 혼신을 다해 쓴다. 다 쓰고나면 하얗게 뼈만 남는다. 짜고 짜서 더 이상 한 방울도 짜낼 게 없는 치약처럼.”

―이외수라는 글쟁이는 평소 세수도 안 하고 이빨도 안 닦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치약에 비유하니까 설득력이 좀 떨어진다.

“허허허, 다 옛날 얘기다.”

그러고 보니 바로 옆에 앉아있는 이외수는 머리와 수염만 좀 길뿐 손톱이나 발톱 등등 모두 단정하게 깎았고, 여윈 손발 또한 깨끗하다. 한때의 이외수처럼 다른 작가들 역시 혼자 집필에 몰두하다보면 며칠씩 씻지도 않고 깎지도 않은 게 예사였으리라. 정신의 말뚝을 박아 몸의 고삐를 방목한다. 적어도 이외수가 글을 쓰며 혼을 시추할 때는 자기가 없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1975년 ‘세대’지에 중편소설 ’훈장’으로 데뷔했는데.

“그에 앞서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처음 쓴 단편소설 ‘견습어린이들’이 당선된 적이 있다. 이 무렵 한국 외국소설을 비롯 엄청 책을 많이 읽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춘천교대 도서관과 창고의 영인본까지 거의 다 해치웠다. 탐식이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고 냉방에서 보름씩 굶는 것은 예사였다.

너무 추워 길거리의 죽은 개를 방안에 ‘모셔다놓고’ 안고 잤다. 개털에 얼굴을 부비니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담배 살 돈이 없어서 김치를 바싹 말려서 말아 피우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매운 끼가 있으면 무조건 말아서 피웠다.

그런데 김치는 역시 김치맛일 뿐이었다. 그때 폐결핵을 앓던 최승호 시인과 같이 자취하며 고생했다. 최 시인의 결핵균을 굶겨 죽이기 위해 우리는 일부러 15일간 단식하기도 했다.

최승호가 지금 뛰어난 시인이 된 것은 그때의 ‘결핵정신’이 큰 바탕이 되었으리라 본다. 이 저주의 나날에도 난 소설을 쓰기 위해 먼지 묻은 원고지를 닦고 또 닦았다. 그러다가 원하는대로 쓰여지지 않으면 느닷없이 원고지를 물에 불려 먹어버리기도 했다. 미친 시절이었다.”

―70년대엔 봉두난발에 거러지처럼 돌아다니면 간첩이라고 신고도 많이 했을 텐데.

“아- 말도 마라. 육군 만기제대해서 복학했는데 이웃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무작정 간첩이라고 시인하라며 박달나무 방망이로 개패듯이 때리고 물고문을 하는데, 내 평생 맞을 매와 평생 먹을 물을 그때 다 먹었다.

그리고 잠 안 재우기 고문도 받았는데 마침 그건 내 전공이라 여유 있게 넘길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네들이 하품하며 못 견뎠다. 그런데 나중에는 갑자기 ‘어디서 훈련받고 왔느냐’며 또 매타작을 했다.”

―전기 고문은?

“그건 받지 않았다. 시골이라 아직 그런 시설이 없어서…. 죽도록 당하며 끝까지 버티니까 결국은 나를 내보내면서 뒤통수에다 대고 침을 뱉으며 한 마디 했다. ‘저 새끼 전기 한 방이면 부는데.’ 비 오는 날 경찰서 문을 나서자마자 실신해버리고, 비에 핏물이 흥건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세간에 흔히 기인이자 도사 같은 선정적인 흥밋거리 위주로만 알려져 있는 ‘괴짜 소설가’ 이외수 그의 젊은 시절에 이런 처절한 핏자국이 있었다니,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피를 토하듯 털어놓는 그의 표정은 그러나 의외로 담담했다.

“그때부터 난 사람과 세상을 불신했다. 파리나 모기한테는 인권이 있어도 사람한테는 없다고.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완장’(공권력)에 대해서 ‘개기기’ 시작했다. 주로 경범죄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지금까지 내 재판기록이 54회나 된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등 폭압의 세월을 지나왔는데.

“내가 비록 박통 시절에 고초를 당하긴 했지만 난 문학과 정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다. 문학예술은 철저히 외로운 독주이지 떼지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니다. 철저하게 고독하지 않으면 ‘진짜’가 나오지 않는다. 결국 문학 외적인 것은 사라지고 작가도 사라지고 오로지 작품만 살아남는다. 문학은 현실의 적이고 현실은 문학의 적이다. 문학이 현실의 적이 아니었다면 정말 아름다웠을 것이다.”

―1981년도에 발표한 소설 ‘자객열전’은 다소 현실을 비꼬며 풍자하기도 했는데.

“80년 광주에서 ‘참극’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율했다. 그런데 ‘꿈꾸는 식물’의 저자라서 그런지 알아주지를 않았다. 이때 나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뻔하기도 했다.

샘밭 시절 ‘장수하늘소’를 쓰며 ‘들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옛날 간첩으로 끌려가 고문받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무조건 드러누워 ‘세상 사람들아 저놈들이 또 이 가난한 글쟁이를 끌고가 간첩으로 개패듯이 때려잡으려고 한다’며 대성통곡했다.

이웃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검은 옷’들은 물러갔다. 아마 그때 끌려갔다면 ‘들개’란 장편소설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그 무렵 우연히 서울역에서 이문열이를 만났다. 나는 ‘장수하늘소’를 문예중앙에 발표했고 그는 ‘사람의 아들’로 한창 뜨고 있을 때였다. 대낮에 만나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서로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열이가 갑자기 ‘이 형, 우리 오데 가서 시비라도 걸어 늘씬하게 얻어 맞읍시다’하고 이상하게 자학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거 좋은 생각이다!’며 같이 지하도로 내려가 조폭이 관리할 듯한 보석 노점상한테 가서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부르며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물론 그 ‘자학적인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시대가 우리로 하여금 벽이든 바위든 머리를 짓찧으며 나를 폭발시켜버리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이외수와 12시간을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지만 그의 얘기는 끝이 없다. 김지하의 원주 연금 시절, 집에 온 그에게 ‘큰 맘 먹고’ 양주와 치즈를 대접했다가 거절당한 얘기, ‘코드’가 맞을 것 같지 않는 박노해 시인과 밤새도록 코드를 맞춘 얘기, ‘들개’ ‘칼’ ‘벽오금학도’ ‘황금비늘’ 등의 번역을 통한 유럽 진출 얘기, 우리 시대의 사랑의 정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장편을 쓰고 있다는 얘기 등등. 마지막으로 꾸준히 독자가 많은 비결을 물었다.

“자기의 혼을 바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의 혼이 흔들리기를 바라겠는가?”


출처 : 로드넷
글쓴이 : 飛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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