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스크랩] "삶의 판을 바꾼 농부 전희식" - 귀농통문28호....

그린테트라 2010. 6. 2. 15:27

  삶의 판을 바꾼 농부 전희식 홍문국
『귀농통문』 편집위원
hbawoo@hanmail
 
 

노동운동이 한껏 고양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가벼운 후일담이 되어 간간이 들려오게 되었을 무렵, 어렴풋이 그 이름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뒤로 인터넷 신문 <오마이 뉴스>에 실린 귀농일기를 통해서 다시 발견하였다. 서로 멀어 보이는 ‘노동운동’과 ‘귀농’ 사이의 간격을 넘은 사람에 관심이 끌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이를 찾아 나섰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농부 전희식 씨다.

귀농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궁금한 한 가지가 있다. ‘무얼 하다, 무엇 때문에 귀농했을까?’ 하는 것이다. 담담하게 ‘그저 직업이 회사원에서 농부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삶과 가치관의 전면적인 전환’ 때문이었노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속내를 들여다보면 역시 만만치 않은 사연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 어제와 꼭 같은 오늘을 사는 사람이 어찌 있겠냐만, 귀농 전후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엔 그 변화의 과정이 예사롭지 않았으리란 생각에 궁금증이 더하다.
요즈음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란 말이 무슨 금과옥조처럼 되어 있지만, 때론 과거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미래를 꿈꾸어보기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싶다. 상투적일지 모르지만 우선 과거 행적(?)부터 물었다.
1980년대 중반 얼어붙은 정치 상황을 뚫고 인천 부평의 대우자동차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킬 당시 열성 일꾼이었으며, 그 일로 해고된 뒤 노동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 1991년에 대우자동차 노조원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출옥 후에는 진보정당 운동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사회 변혁을 위해서 “온몸을 던져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1992년 9월, 대선 직전에 터진 대형 공안사건에 연루돼 안기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망가졌”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 극기의 세월을 보낸다.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출가를 감행하기도 했다. 새벽 예불과 삼천 배의 수행을 이겨내며 점차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이 말대로 “일단 결심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결행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변화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대개 귀농자들은 생태주의의 세례를 받고 적극적으로 귀농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만큼 가치관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 큰 계기가 되는 듯 싶습니다. 귀농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또한 어떤 삶을 지향하시는지요?

최근의 귀농자들은 대개 그런 것 같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계속 도시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오다가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생태주의 가치관으로 잘 정립이 되면 생활의 편리나 효율에 대해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게 되니까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데서 오는 불편은 재미있게 감수하기도 하지요. 좀 모자라고 좀 불편한 것이 참 재미있단 말예요.
풍족할 때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그런 게 있더라구요. 뭐랄까, 경지라고나 할까요? 분명 그런 게 있습니다. 일이 고되더라도 작물이나 땅, 농기구 등과 친밀하게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일을 하는 정도가 되면 몸이 고단해도 마음이나 느낌은 아주 상큼하거든요. 이 모든 게 생태주의에 대한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런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귀농할 때는 귀농운동이 시작되기 전입니다. 저는 사회운동을 죽 하다가 어느 한계 지점을 맞게 된 것 같아요. 누구나 그렇듯이, 한 가지 일을 전념해서 오래 하다 보면 어떤 위치에 이르게 되잖아요. 지위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말입니다. 어찌 보면 저도 자연스럽게 이제 좀 삶을 바꿀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고 봐야할 것 같아요.
그런 상태에서 저는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수련을 할 기회가 있었고 이것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 속에 꾸준히 축적되어 온 막연한 새 삶에 대한 갈망이 한순간에 가닥을 잡게 되는 그런 계기 말입니다. 야마기시 얘기를 좀 해야 제가 귀농으로 이어지는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겠는데 뭐 이건 아는 사람도 있고 할 테니 이 정도로 하죠.

‘연찬회’라 이름하는 야마기시 수련이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불가마니 속같이 뜨겁게 용해되었을 저간의 사정과 맘 깊은 곳의 변화는 일일이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것 같다. 그렇더라도 귀농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는 밝힌 셈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변혁운동에 앞장섰던 그가 고향인 경남 함양도 아닌 전북 완주의 덕유산 골짜기로 귀농한 것은 지난 1995년. 그러니까 지금은 햇수로 9년차에 접어들었다. 전라도에 귀농한 경상도 사람, 정착하기 어렵지는 않았을까? “오히려 보기 힘든 경상도 사람이라 더 귀히 여기고 좋아”하더란다.

한 곳에 뿌리내리기까지 몸도 마음도 적응기의 시련을 겪었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지금도 저는 제가 완전히 정착했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아니 때론 나도 이제 뿌리를 내렸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없는 건 아니구요. 성장 속도가 느린 나무를 심었어도 10년이면 뿌리가 몇 자는 박았을 터인데 결심을 단단히 하고 귀농한 지 10년인데 뿌리 좀 내릴 만하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은 게 농사는 할수록 새로 하고 싶은 게 많아져요. 아니, 새로 해야 하는 그런 일이 생겨요. 종자 채종도 그렇고 새로운 농기구 제작도 그렇고, 뭐 섞어짓기 할 때 작물 선택도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구요. 그래서 아직 생명의 농사에 뿌리를 다 내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구요. 아직도 여전히 어려움이 많고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많다는 얘긴데요. 초기에 어떤 일이 있었냐 하는 것이지요?
네. 아무래도 땅을 샀다가 경매에 들어가고 다시 되찾는 과정에서 겪었던 애로가 먼저 떠오르네요. 동네 이장네 땅을 샀는데 이장이라고 해서 너무 믿었던 게 잘못이죠. 저당 잡힌 땅이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애를 상당히 먹었습니다. 돈도 많이 날렸구요.
또 한편으론, 아무래도 자연농이라고도 하고 생명농사라고도 하는 요즘 식으로 생태농이라고 지으면서 감내 해야 하는 눈총이 큰 부담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형편없는 수확과 만날 풀밭인지 밭인지 모를 그런 상태니까, 곡식 한 톨도 그냥 안 놓치는 동네 어르신들의 성화가 말도 못했습니다. 남의 일에 간여를 잘 안 하는 그런 동네 심리도 있지만 그래도 시골이라 허구헌날 얼굴 맞대니까 말을 막 하잖아요. 특히 내가 나이가 한참 아래고 하니까.
정말 말을 막해요. 나중에는 “하시기. 왜 내 말 안 들어? 어? 제초제부텀 뿌린 다음에 파종하라 그랬지?” 이런 식이 되더라구요. 동네 할아버지가.

현재 살고 계신 곳을 선택하신 이유는?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네. 사람살이가 다 인연이죠. 우리 살아가는 게 인연들의 연속 그거 아니겠어요? 직접적인 인연이 없더라고 중중연기라고 하잖아요. 다 얽히고 설킨 연고 속에서 살아간다고 보는데 그걸 훤히 알고 지날 때도 있고 잘 모를 때가 있을 뿐이지 인연이 다 있다고 봅니다.
이곳에서 가톨릭 농민회 간부로 계시는 선배가 있었어요. 서울서 전국연합이라는 단체 사무처장으로 일을 하실 때 알게 되었고 그 인연이 인연이라면 인연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인연을, 내 삶 속에 이쪽 지역으로 향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인연이 놓여 있었던 것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지나서야 비로소 이게 내 뜻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인연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하…… 뭐 그런 얘기 굳이 할 그런 게 아니구요. 저 자신이 몇 년이나 지나서야 알게 된 인연이라는 것을 발설 할수 없지요. 양해하십시오.
그런데 이 동네 또는 이 땅, 이 집터 이런 것은 그냥 여기저기 직접 찾아다니고 거래를 넣어보고 하면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경우와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농사도 하면서 당장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으니까 지역 농민회에서 세운 유기농산물 가공회사에서 며칠에 한 번씩 트럭 운전을 하고 먹고살았습니다. 마침 우리 집에서 가까이 있었던 터라 그게 가능했죠.

귀농을 통해서, 또는 농사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예상했던 대로 된 것도 있고 또 예상치 못했던 것도 있습니다. 귀농해서 얻은 것 이라면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는 생활리듬이 싹 달라졌다는 것이죠. 아주 좋은 쪽으로 확 바뀌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이 되었어요. 저녁 9시 뉴스를 다 못보고 꼬꾸라져 잡니다.
제가 기공이나 국선도 그리고 명상 등을 귀농 이전에도 했었는데 귀농하면서는 수련이 몸에 녹아드는 생활이었습니다. 날이 지면 자고 날이 새면 깨어나는 자연 운행에 내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딱 맞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렇게 살아보면서 몸과 마음을 잘 살펴보면 정말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이야말로 인류 최악의 범죄자라는, 물론 농담이지만요 사람은 밤에는 자야 한다는 것이지요. 밤이 긴 겨울에는 더 많이 자야 합니다.
지금이 겨울이 시작되는 게 겨울의 어원이 ‘겨우’라는 것입니다. 겨우살이라고 하잖아요. 겨울에는 겨우겨우 살아내는 때라는 거지요. 적게 먹고 적게 움직이고 많이 놀고 많이 자야 적게 먹어도 되잖아요. 겨울이건 여름이건 노동시간이 똑 같고 여전히 같은 양을 먹는 도시 생활은 ‘겨우살이’가 아닙니다.
둘째는 내가 자연속의 하나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교만이라고 할까 그런 게 많이 사라진 것을 들 수 있겠네요. 농사하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게 정말 보잘것없어요. 솔직하게 따져보면 그래요. 자연이 해 주는 것이 90%라고 봅니다. 특히 생명농에서는 자연의 움직임에 전혀 안 거스르는 농사를 추구하니까 당연히 자연에 무릎 탁 꿇고 네. 네. 하는 것이지요.
셋째는 뭐가 있나……. 성질 많이 죽고 여유로워진 것입니다. 시골 산다고 다 그렇게 되는 건 정말 아닙니다. 제대로 된 농사를 지을 때만 누구나 그렇게 된다고 봅니다. 뭘 몰라서 못한 것은 어쩔 수 없고, 저는 정말 제대로 된 농사를 원칙대로 지었습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평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툭 하면 이라크 침공이나 미국의 침략이나 남북 분단 등 큰 이야기들을 놓고 평화를 얘기하고 생명을 얘기하는데 출발점은 뭐라 해도 내 몸이 평화로운가, 내 마음은 참으로 온전한 평화 상태인가가 아니겠어요? 내 안의 평화가 세계평화랑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생명농사를 하게 되면 생명의 본성인 평화가 찾아온다고 확신합니다. 왜냐? 장맛비에 고추밭에 역병이 휩쓸었다고 하늘보고 팔뚝 걷어붙이고 맞짱 뜰 수야 없잖아요. 가물면 가문 대로 어허 차~암 하며 혀를 한번 차고는 묵묵히 도랑물에 호스 꽂는단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면 순응하고 수용하고 관용한다는 것입니다. 농사라는 것 자체의 생리가 그렇다는 것이에요. 도시에서는 원망의 대상이 너무나 명백하잖아요.
시설농이다. 규모의 농사다 할 때는 이런 원칙이 다 무너집니다. 만날 눈에 핏발 세우고 작물 원망하고 종자회사 욕하고 작목반 비난하고 정부 정책 규탄하고 그렇게 되지요.

이 시대의 환경 속에서 ‘자립적 삶’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은 또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 아녜요? 스스로 살 수 있는 것. 정전이 되어도, 눈이 많이 와서 기름차가 안 와 보일러를 돌리지 못해도, 먹을거리 값이 폭등을 하여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그런 삶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식의주에서 스스로 충당하고 유지하는 비율을 70~80%는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먹을거리는 90%정도 하구요. 식의주를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하여 사는 게 도시 생활입니다. 그러면 병난다고 봅니다.
더 나아가서 교육, 의료, 놀이, 문화, 옷 짓기, 집짓기 등에 높은 자급율을 갖는 것이라 봅니다. 어떻게 가능하냐?
아주 간단합니다. 제 10년을 걸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농사를 지으면 된다고 봅니다. 득도하는 것이 선승의 면벽 수련에만 있지 않고 청소부가 비질 하나만 제대로 잘 해도 된다는 것은 왠만한 영성 서적 한 권 들춰보면 다 나오는 얘깁니다. 틀린 말 아니라고 봅니다. 참 생명의 농사를 짓게 되면 그 속에 건강과 식량과 옷과 천연 염색과 아이 교육과 음악과 그림이 다 있다고 봅니다. 이번 가을에 볕이 좋았잖아요. 제 눈에는 장면 하나하나가 멋진 한국화 한 점이 되더라구요. 내 시선의 각도에 따라 형형 색색 달라지는 그리고 움직이는 그런 그림이더라구요. 하루하루 물들어 가는 가을색이 황홀했습니다.
생명의 농사를 제대로 지으면 새벽 이슬에 젖어서, 땀과 흙덩이에 범벅이 되어서 만끽하는 희열이 바로 그림이고 노래고 춤이라고 봅니다. 춤이 있는 곳에는 병이 없습니다. 흔히 스텝(!)이 요구되는 그런 춤말고 흥이 올라와 절로 추어지는 마음의 춤 말입니다.

앞으로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이곳은 전주 시내가 20분 정도예요. 실제론 열댓 가구 밖에 안 되는 산골이지만 도시가 가까운 탓에 농지가 너무 비싸요. 올해 제가 700평 지었는데 저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 허우대가 보통이 아니잖아요. 기운도 세고. 뭐 그런데 농지를 늘리고 싶어도 밭 한 평이 10만원 오르내리니 농사 못 짓죠. 그래서 하는 얘깁니다.

귀농운동이 지향하는 가치가 사회 전체의 대안이 될 수 있겠는지요. 또한 귀농운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지요.

이 부분은 제가 뭐라 말할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권력에 대한 구상 없이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귀농운동의 역할과 의미는 한 마디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귀농운동본부에서 개념정의 하고 있는 귀농운동이라는 것은 참 생명운동이라고 봅니다. 생명의 첫째는 먹는 문제입니다. 또한 입는 문제고 집 문제입니다. 이 모두다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농업이 그냥 농업이 아니고 생명농업이 참 생명운동입니다. 어떤 어르신은 생명운동하는 사람도 구별하더군요. 지 손으로 볍씨 한 톨 틔워 보지 않는 사람, 생명 하나 가꾸어 보지 않는 사람은 헛 생명 농군들이라구요.
귀농운동은 도시문제나 교통문제, 교육문제 등을 해소하는 데도 큰 역할이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잘만 된다면 말입니다. 도시 생활에서는 아이들 교육이 사실 대책이 없습니다. 표본실 안에서 하는 생명교육이란 건 한계가 명백하니까요. 시골에서는 특히 제대로 농사를 짓는 시골이라면 천지(天地)가 교실이고 천지가 교재이고 천지가 선생입니다.

지역 사회의 여러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데요.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지, 농사와 어떻게 조화를 꾀하시는지요. 귀농인이 지역 사회에서 기여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은 어떤 것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네. 제법 여러 단체의 일을 합니다. 단체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하는 일이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제가 중심을 두는 생명농사와 다 연관된 일이라 이중으로 힘을 들여야 하지 않아서 그냥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의 기자로서 개인 섹션을 갖고 글을 쓰고 있는데, 그 밖에도 ‘길동무’(refarm.or.kr)라고 작년에 <우리쌀지키기 100인 100일 걷기 운동>을 했던 단체의 사이트 운영자이기도 합니다. 길동무는 올해 풀꽃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 시민단체인 <시민행동21>에 간부로 일하구요. 여기저기 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합니다. <수돗물 불소화 반대 도민연대>에 참여하고 있구요.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아주 쬐끔 일을 하구요.
‘창비’라는 문예지를 오랫동안 정기 구독하면서 ‘독자모임’에 참여하구요. ‘동사섭’이라는 명상수련 단체 회원으로 정기적인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아궁이불에 감자를 구워먹다』라는 책을 한 권 냈는데 근 한 달 가량 신문 방송 잡지 인터뷰하고 방송 출연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네요. 지난주에는 한 주 내내 ‘보따리학교’라는 대안 교육 프로그램을 우리집에서 실시하고 바로 지리산 실상사로 가서 지리산 생명평화 결사에 참여하고 이제 돌아 왔습니다.
저는 귀농인이 할 수 없는 사회 활동이라는 건 없다고 봅니다. 무슨 말이냐고 하면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 근기라는 것이 다 있기 마련이고,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 볼 수만 있으면 의례적이거나 생색내기 또는 가당치도 않는 의무감 따위로 시선을 자기 외부로 돌리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해지면 귀농인으로서 할 수 없는 사회 활동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심, 농사 지으랴 사회 활동하랴 어느 것 하나는 소홀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잣대로 본 선입관일 뿐인 것 같다. 굳이 내 세계와 세상 사이에 경계를 긋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는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농주일기(www.nongju.net)라는 그의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다.

“노동자 세상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은 풀꽃 세상의 ‘생명사랑’과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두 세상이 내 속에 아무 충돌 없이 공존한 하루였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자는 구호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정작 살아 있는 생명, 상한 생명 곁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가려 하지 않습니다. 다소곳이 얌전한 식물과 꽃, 나무, 새 같은 생명은 귀하게 대접받지만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는 노동자들의 외침에는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정치인들의 속 뻔한 거짓말과 상대방의 허물을 먹이로 삼아 지탱하는 정치 집단의 생존전략들마저 신음하는 우리 생태계를 보는 것 같아 마냥 안타까울 뿐입니다.”

출처 : 김목수 시골가다
글쓴이 : 김목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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