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스크랩] 귀한 자작나무

그린테트라 2010. 5. 1. 11:19

 

 

 대동강물이 풀리고 개구리 입이 떨어진다는 경칩이 지났것만 이 겨울은 아직도 끈질기게 봄을 떼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늦게 내린 눈속에 파묻힌 자작나무들의 옹골진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 중에 찾은 것은 작은 부분이지만 자작나무에 대한 글들을 발췌헤 봅니다. 

 

자작나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가 자작나무를 좋아하고 가까이 하게 된 결정적인 글이 바로 소설가 정비석님의 '산정무한' 중의 이 구절이며 46년전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구절로 지금도 외우고 있는 대목으로 자작나무를 나무 중에 공주라 읊은 글이기도 합니다.

"비로봉(毘盧峰) 동쪽은 여인네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 수해(樹海)였다. 설 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다는 자작나무는 수중(樹中) 공주(公主)이든가......."

 

다음은 평북 정주(定州) 출신 백석(白石) 시인의 시(詩) '白樺'에서는 인간의 생활 환경 자체가 온통 자작나무인 시입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너머는 平安道땅도 뵈인다는 이 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다음은 서울대 송호근 교수의 '나타샤와 자작나무' 란 글 중에서 '닥터지바고'와 시베리아와 위의 백석 시인과 김자야와 자작나무에 대해 발췌한 글이다.

제 개인적으로는 자작나무를 한층 깊이 아끼고 사랑하게 된 게기의 글이기도 하답니다.

"자작나무는 군락을 이루어야 제격이다. 홀로 초라해뵈던 깡마른 나무가 군락을 이루면 금세 늠름해지며 혁명의 냄새를 피운다.

러시아 혁명에서 빨치산들이 피로에 지쳐 돌아오던 아지트도 자작나무 숲이었고,'닥터지바고'가 달빛을 틈타 혁명군들을 등졌든 곳도 자작나무 숲이 였다.

말년에 농사꾼이 되어파스테르나크의 농장 뒤편 숲은 온통 자작나무로 뒤덮여 있어다.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승냥이가 떼지어 몰려드는 곳은 자작나무 숲이다.

자작나무 숲은 늑대들의 눈덮인 설원의 방황을 호소라도 하듯 토해내는 울음의 여운을 고요히 간직한다. 바람이 서걱거리는 자작나무 숲에 들어서면 검게 변한 낙엽마다 그런 기억들이 묻어난다. 열정과 사랑의 끝을 예고라도 하듯, 행여 눈물이 비칠까 마른 몸을 흰 수피로 둘렀다. -중략- 자작나무 숲은 권총으로 자살한 마야코프스키의 시(詩)를,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가로질러 흐르는 '고요한 돈강'을, 지바고가 라라와 마지막 며칠을 지냈던 바리키노의 설원을,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 속에 묻힌 크고 작은 봉기(蜂起)들을 상기 시킨다.

 

일제시대 시인 백석(白石)에게 함흥은 '바리키노'였다. -중략- 그의 시세계의 원경(遠景)은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산 너머는 평안도 땅이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白樺')

 

자작나무가 둘러쳐진 그의 시세계로 무작정 걸어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22세의 기생자야(子夜.본명 김진향) 자야는 생활고 때문에 권번(券番기생조합)으로 들어가 예인(藝人)의 길을 걸었던 신여성(新女性)이 었는데, 독립운동 혐의로 감옥에 갇힌 그녀의 후원자를 만나러 함흥으로 갔었다. 백석과의 조우는 우연이 였지만, 불꽃이었다. 단 한번 부딪힌 한 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매듭이 없는 슬픈 사랑의 실타래는 이미 그 때부터 풀려가고 있었다.(김자야 '내사랑 백석')

 

 그들의 '바리키노', 함흥의 시간은 짭ㄹ았다.부모의 강권으로 백석이 세번이나 결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백석은 도망쳐 태연하게 자야의 곁으로 돌아왔다. 자야는 홀로 함흥을 떠났다. 경성 청진동에 은거하던 자야를 찾아 백석은 태연하게 시 한 편을 전했다. 자야가 '삼천리'에 발표했던 '눈 오는날'을 시화한 뱃석의 사랑 고백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사랑의 공동체 '마가리'로 떠나고, 자야는 경성에 남았다. 자야는 그가 또 태연하게 나타날 것으로 믿었다.

 

 백석은 만주에서 몇 년 방랑생활을 하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함흥을 떠날 때처럼 그들은 서로를 기다렸다. 그러나 38선이 그어지고 전쟁이 터졌다. 재북(在北)작가가 된 백석은 사회주의풍의 시를 자주 써야 했지만, 그것의 배경에는 항상 자작나무가 둘러쳐진 토방(土房)의 공동체가 있었다. 자야가 남한에서 기다림의 얘기를 출간한 무렵(1995), 백석은 어느 산골에서 죽었다. 자야가 지어준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을 게다."(중앙일보 2004. 2. 7.)

 

송호근 교수가 표현한, 백석 시인의 애뜻한 자작나무와 사랑이야기가 마음을 찡하게 함은 무엇 때문일까? 그래서 자작나무의 꽃말이 이 글에서처럼 백석과 나타샤의 영원한 기다림인 '당신을 기다림니다.'가 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李圭泰코너'에서 발췌한 '자작나무佛經'의 글입니다.

탈레반에 의하여폭파된 아프가니스탄 소재 바미안 대불(大佛)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7세기경 자작나무 껍질에 쓴 불경 파편 수십 점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범어(梵語)로 선(善)이라는 단어 등이 판독되었다는 이 발굴현장에는 53m 높이의 세계 최고 석불이 서 있었으며 그 규모가 크고 신기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쳤었다. 이미 칭기즈칸에 의해 하반부가 손상을 입었고 그 후 이 땅을 지배했던 이슬람에 의해 얼굴이 깍인 이 대불이 연전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과격 탈레반에 의해 폭파돼 온 세상이 분노했던 바로 그 현장이다. -중략-

 

신라스님 혜초(慧超)가 지나가면서 써 남기기를 '초목이 한 그루도 없고 마치 불에 탄 산야만 같다.' 했는데 지금도 다름없이 황량한 이 바미안 계곡에 한대(寒帶) 식물인 아름드리 자작나무 가로수 길이 나 있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하얀 예스러운 대불(大佛)호텔이 나오는데, 겉이 하얀 것은 흰 페인트를 칠을 해서가 아니라 하얀 자작나무로 벽을 쳤기 때문이다.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틀도 자작나무요 벽에 걸린 그림도 자작나무 액자다. 이 북방 한대에 자라는 유일한 나무가 자작아요 이 나무 껍질로 깔때기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 쓰고 생활 용기의 거의는 이 자작나무 껍질이며, 성소에 걸려 있는 성화(聖畵)도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졌다.

 

바이칼지방에서는 호수의 보트마저도 자작 껍질로 만든 것을 보았다.

신라 고분에서 자작나무 신발이 나오고 천마가 그려진 자작나무 말안장이 나왔는데 이 모두 기마민족에 의해 신라에 전래된 한대(寒帶)문화들이다......."(조선일보)

 

이외에도 자작나무 수액이 건강음료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윗글에서 보시듯이 참으로 귀한 용도로 쓰이기도하는 자작나무입니다. 시베리아에 사는 어느 부족은 집안에 귀한 손님이 오면 집안 벽난로에 마른 자작나무로 불을 집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풍습을 가진곳도 있다고 하듯이, 자작나무는 눈쌓인 시베리아 한대에서 혁명과 애톳한 사랑의 상징적인 나무에서, 북방 함경도 지방에서의 토방에 모닥불 지펴 둘러 앉은 시골의 정감 어린 옛날 공동체 생활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나무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일상생활 속에 깊이 베어 있는 생활의 도구에 쓰였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의 목판도 자작나무라니 정말 자작나무의 사용을 통한 인간과의 물질적 정신적 교감은 무한했든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라도 자작나무 둘러쳐진 곳에 아담한 황토방을 짓고 이 곳을 찾아 주시는 분들과 세상을 이야기할 공간을 만들고 싶네요.

여러분 그날이 빨리 오기를 모두 기원해 주시면 아주 빠르게 닥아설것 같네요.

 

 

출처 : 지금 설하는......
글쓴이 : 박주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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