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스크랩] 성공한 귀농인 시리즈 (7) 다양한 시각과 가치관의 변화 -위기가 곧 기회

그린테트라 2008. 8. 23. 18:39

15인의 귀촌·귀농인이 말하는 ‘농촌 성공스토리’

 

과감한 결정, 치밀한 준비가 포인트

 

 

 

받는 만큼 땅으로 돌려주는 농부, 흙을 믿는 사람
'배 농사' 전문 강사인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의 최정식씨
▲ 최정식씨 부부가 과수원을 배경으로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겨울에도 퇴비 만드느라 휴식이 없다.

 

최정식(50)씨. 배 농사를 지으면서 그를 모르면 안 된다. 그는 나무보다 흙을 믿는 사람이다. 누구라도 만나면 그는 자신이 흙 가꾸는 비결을 아낌없이 들려준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에서 배 1만4000평, 사과 4000평 농사를 짓고 있는 최정식씨는 이미 배 전문 강사로 자리매김했다.

25년 동안 뛰어난 배 농사 기술을 가진 농부들을 찾아다니거나 직접 농사지으면서 자신이 몸으로 체득한 노하우를 전하는 최씨는 흙이 튼튼하지 않으면 절대 제대로 된 과수농사를 할 수 없다는 굳은 철학을 갖고 있다.

겨우내 퇴비 재료들을 모으고 뒤집어 발효시키느라 분주한 그를 만나 퇴비에서 올라오는 훈훈한 열기 같은 올곧은 농사철학을 듣느라 한겨울 추위도 잊었다.

 

최씨는 이른바 귀농자다. 영덕이 고향인 그는 군대에 갔다 와서 서울에서 귀금속 사업을 하다가, 그의 표현대로 '쪽박 차고' 땅을 좀 사 두었던 안성으로 내려왔다. 어려우면 농사짓는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는데, 농사짓는 힘이면 절대 사업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데는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25년 전, 처음에는 사과농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배 재배가 사과보다 좀 쉬워 중간에 배로 바꾸었다. 최씨가 생산하는 배와 사과의 50%가량은 소비자와 직거래를 한다. 나머지는 농협으로 낸다. 개인회원이 400명 정도 되는데 농사방법이나 사진을 함께 보내 고객관리를 한다.

소비자 행사도 개인적으로 준비해 펼친다. 안전하고 맛있으면 최고라는 생각으로 했더니 꾸준히 단골로 이어지고 그 소비자가 다시 신규소비자를 몰고 온다. 3월 되면 물건이 떨어진다고. 항상 과일 값을 고정했다. 그래서 수확기 때는 다른 것에 비해 비싸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오히려 싸다. 최씨는 사업을 해서 그런지 소비자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최씨는 닭똥, 소똥, 버섯톱밥, 한약재, 가랑잎, 풀, 짚, 갈대 같은 유기물 재료에 흙살림골드를 잘 섞어 발효시켜 매년 150톤 정도의 퇴비를 밭에 뿌린다. 나무의 수세를 봐가며 도장지가 많고 좀 수세가 세다 싶으면 적게 주고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에 따라 뿌리는 퇴비의 양을 조절한다.

과일 맛 내는 데는 톱밥이 제일 좋은 것 같다. 버섯 톱밥은 어느 정도 부식된 것이고 값도 싸서 짧은 기간에 바로 쓸 수 있다. 풀도 야적해서 옛날 식으로 토종퇴비를 만들어 가능하면 매년 쓴다.

여러 재료를 구하러 다니느라 그의 발걸음은 사방으로 뻗친다. 생선냉동창고에서 생선을 5톤 얻어와 액비를 담고 막걸리 찌거기도 50톤 정도 얻어온다. 게 가공공장에서 매년 20톤 정도 게 껍질을 얻어와 키틴을 만든다. 어디든 재료가 되는 곳이면 쫓아 들어가 구한다. 쫓아 다닌만큼 재료 구하기는 쉽다. 돈 주고 산 적은 별로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재료가 있는 쪽에서 치워주었다고 고마워한다고.

가능하면 가을에서 겨울까지 발효시킨다. 재료들은 쌓으면서 거적을 덮지 않는다. 여름과 가을에는 수분을 공급해야 하지만 겨울에는 수분공급에 애로가 있다.

그는 과수 하는 분들에게 꼭 권장하는 재료가 있는데 바로 해초다. 2년째 사용하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실험하다가 작년에 전면적으로 휴면기에 1번, 초기에 2번 등 3번 살포했다. 계곡 근처 나무에서 매년 냉해가 있었는데, 해초를 뿌리자 냉해 현상이 사라졌다. 기형과도 적다.

안성배연구회 회원에게도 권해 해초를 쓴 농가만 냉해를 안 입었다. 꽃눈은 영하 1도만 내려가도 어는데 해초는 심해 풀이라서 추운 곳에 강한 유전인자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농약은 배는 6회, 사과는 7회 정도 친다. 6월에 봉지 싸고는 안친다. 그 다음부터는 친환경농자재로만 관리한다. 유기농자재는 농약 사용하듯 하면 안 된다. 한번 칠 때는 흠뻑 맞을 정도로 쳐야 한단다. 양분조절은 어느 자재든 어느 정도 해결하는데 전반적인 방제관계를 빨리 개선해야 심도 있는 유기농이 발전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친환경농가에서도 수확량을 안 줄이려고 자재를 많이 넣어 과다 영양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잘못이라고 한다. 영양을 과다하게 준 과일과 자신의 과일을 비교하면 저장성이나 육질에서 차이가 난다고 한다.

최씨는 액비도 안 만들어 쓴다. 염류집적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자라게 하는 것이 최고라고 말한다. 칼슘제는 전혀 써본 적이 없다. 토양에 충분한데 주면 한쪽의 균형만 깨질 뿐이다.

그는 농사짓는 사람이라면 자기 땅의 5%는 퇴비장으로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 그의 퇴비장에는 80톤 정도의 퇴비가 잘 익어가고 있다. 야적한 높이는 1∼2미터를 넘지 않는다. 많게는 5번까지 스키드로드로 뒤집기를 한다. 그렇게 뒤집어도 40∼50cm만 발효되기 때문에 밭에 나갈 때 잘 뒤집어서 실어나간다.

▲ 퇴비장, 여러 자연재료가 섞여 발효가 되고 있다.
ⓒ 이우성

그는 토양 가꾸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새로운 자재는 조금 써보고 효과가 괜찮으면 전체로 확산한다. 큰 과일은 비료를 주면 되지만 맛있는 과일은 퇴비뿐이라는 신념이다. 퇴비를 준 과일나무는 가물어도, 비가 많이 와도 과일 맛에 지장이 없다. 2월 안에 밭으로 다 나간다. 매년 300평당 2톤가량 뿌린다. 사과나무는 25년생부터 있는데 점차 줄여 배로 옮겨 심고 있다.

그는 매년 2번씩 토양검사를 한다. 검사 결과를 두고 회원들과 심도 있는 토의를 한다. 그가 흙을 최우선으로 가꾸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0년 전 3년간이나 무농약재배를 시도하다가 쓰디쓴 실패의 경험을 했다. 자그마치 3억원 가량이 날아갔다.

"욕심이 컸지요. 토양은 준비가 안 돼 있는데 뭐가 되겠어요? 망하고 빨리 뒤를 돌아보니까 땅이 살아나면 병충해가 억제된다는 걸 알겠더라구요."

그때부터 토양 만들기에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견학도 다니고 공부도 많이 했다. 기술보다는 이론정립을 우선했더니 기술은 금방 터득할 수 있었다. 10년 배울 것을 5년 안에 배울 수 있었다. 궁금한 것은 해결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지금 유기물 함량을 6%대까지 끌어올렸다.

기본농업에 충실하면서 유기농업을 해야지 무대포로 해서는 자기만 손해라고 전한다. 돈 때문에 쉽게 달려들어서는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충고한다. 뜯어고칠 것은 마음자세요, 생각이라는 것이다.

생산비에 비해 유기농 과일 값이 따라주지 않으니 소비자 목표를 정해 거기에 맞추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유기농에서 생산비를 줄이는 것은 힘이 든다. 유기농쌀이 남아돈다고 하는데 그것도 목표설정이 잘못됐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그래서 상류특수층을 겨냥한 유기농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환경농사 짓는 농민은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사필름은 흙에 묻어도 썩지 않고 200년은 간다. 그래서 그는 반사필름을 깔지 않는다. 그는 일체 외국여행은 자제하고 소비를 최대한 줄인다. 이제 농민들도 빠른 시간에 기술을 정립하고 정신을 무장하는 일이 시급하다. 그렇지 않으면 농업식민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 고집과 주관을 갖고 자기 농사는 철저히 짓는 것이 제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저농약으로 흙살림인증을 받았고, 20여 명 되는 회원을 가진 흙살림원곡지회 회장으로 있다. 농촌지도사, 안성새농민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품평회에서 수상경력도 많다.

부인 김정희(49)씨도 상농사꾼. 농사짓는 보람은 어디든 얽매이지 않고 다닐 수 있어 좋다고 한다. 하고자 하는 일에 만족하는 삶, 그것보다 편한 것이 어디 있으랴.

"눈을 감는 날 때까지 토양을 살리면서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그는 이제 꿈이 하나 생겼다. 농촌을 살릴 수 있는 관광농업을 하고 싶단다. 앞으로는 농촌의 자산인 향수, 시골정서 등이 상당한 수입도 올리고 중요한 때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기회가 되면 고향인 영덕같이 바다가 있고 계곡이 있는 농촌지역으로 내려가 옛 농촌의 형태가 남아 있고 순수한 마음의 주민들과 함께 순수한 순환농업을 하고 싶단다. 어릴 때 추억을 나누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 준비를 지금부터 착실히 하고 싶다고 전한다.

형편이 어려워 공부 못하는 아이들도 도와주고 싶다. 지금은 꿈이지만 가능할 것도 같다는 확신을 말할 때는 목소리가 굵다.

농사짓는 사람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그의 선 굵은 목소리에서 빛을 본다. 주춧돌 같은 생각, 쉽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다. 그에게서 한국 농업의 등대를 본다. 그 빛이 안개 낀 한국농업의 바다를 환히 비출 것을 믿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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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역사 이해하고 결부시키면 성공확률 높아져 … 현지 정보에 촉각세워야

귀촌·귀농에 대한 도시민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10년내 꼭 귀촌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도 상당수 달한다. 하지만 준비없이 무턱대고 농촌으로 이주했다가 낭패보기 싶상이다.
농림부는 성공사례집 ‘내 인생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발간해 귀촌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책자에 나온 15명의 귀촌인이 말하는 농촌생활 경험을 유형별로 재구성해봤다.

강원 화천 ‘산속호수마을’로 귀촌한 김명웅씨. 김씨가 이곳 산골 벽촌에 들어오기 전만 해도 ‘잘 나간다’는 소믈리에(와인감정사)였다. 그는 제주 신라호텔, 서울 신라호텔, 부산 롯데호텔 등에서 7년 동안 근무했다.
하지만 김씨는 ‘성적 제일주의’라는 전쟁 같은 교육풍토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김씨는 2000년 기득권을 버리고 과감하게 이곳에 정착했다.
전북 고창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진영호 대표도 금호그룹 이사로 재직하던 1992년 귀촌을 감행했다. 진 대표는 당시 그룹 내 동기들 중 최초로 이사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길 탄탄대로도, 주변의 만류도 농촌으로 향하는 그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과감한 선택, 철저한 준비
물론 이들이 한순간 감정에 휩싸여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뿐만 아니라 이후 정착을 위한 준비도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도시에서 실패했으니 농촌으로 가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편안한 도시에서도 실패하고 어떻게 농촌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농촌을 전원생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충남 부여 백제 인동마을 김은환씨는 농촌에서 제2의 삶을 꿈꾸는 사람에게 도시에서보다 더 큰 각오와 열정이 필요하다고 이렇게 조언했다.
98년 대기업 홍보실 등에서 근무했던 경북 봉화 관북마을 송성일씨는 전에 농사를 지어보거나 구경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농사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아무 고추밭에 들어가서 고추 따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루 일당 2만1000원. 그 일당을 받고 보름 이상 이집 저집 돌아다니며 일했다.
“농사일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보다도 힘들어요. 농사일은 되게 단순하거든요. 허리를 구부린 상태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거죠.”
농사일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마을의 주민들에게도 냉담한 시선을 받기 일쑤다. 마침 송씨가 귀농을 했을 때는 IMF 사태가 막 터졌을 때라 ‘저 사람이 지금은 여기서 살지만 떠날 거야’란 생각에 마을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고, 생활 속에서 노인 분들하고 접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마음을 서서히 열어주시더라구요. 지금은 하다못해 형광등 하나를 갈아도 저한테 부탁하고…”

가족이 가장 든든한 우군
가족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도 귀촌·귀농 성공을 위한 키포인트다.
경기 화성 창문아트센터 박석윤 대표가 2000년 귀촌을 결심하자 아내는 울면서 결사반대했다. 아내는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원래 살던 일산에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1년 동안 주말부부 생활을 해야 했다.
꾸준한 설득 끝에 차츰 아내 역시 박 대표의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두 아들 박건우(고2)·박현우(중1) 군은 방송반, 사물놀이반 등을 통해 농촌학교 재미를 빠져있다.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94년 전남 보성에서 안착한 웅치관광농원 김규태 대표는 이렇게 조언했다.
“현지에서 오랫동안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적극적인 내조도 있어야 해요.”
김 대표는 79년부터 바로 이곳 제암산 줄기에 있는 땅 2만4000여 평을 구입했다. 당시 구입가는 1000만원. 김 대표는 토·일요일마다 이곳에 내려와 천천히 가꿨다. 부인은 매일 상주했다. 아들 셋도 적극적으로 아버지 일을 도왔다.
“우리 식구들이 너무나 고맙습니다. 모두 즐겁게 헌신했어요. 집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 셋도 아버지 일에 헌신했지요.”
한국가스안전공사에서 근무하다 충남 부여로 귀촌한 김은환씨는 오랜 시간 아내와 논의했지만 결국 온 가족이 귀촌하는 것은 시일을 두기로 결정했다. 아내는 공주에 있는 아파트에 머물렀고 이후 3년간 주말부부 생활을 했다.
몸이 떨어져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아내에게 자신의 신념과 삶의 철학을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아내가 서울여상 출신이어서 은행금리로 재테크를 잘 하고 경제에 대한 눈이 밝았어요. 97년부터 밤과 표고버섯으로 흑자가 나니까 아내 얼굴이 밝아졌지요.”

수익모델을 만들어야
밤과 표고버섯 등으로 재미를 본 김은환씨는 올해 3월 정부로부터 국유림 15만평을 빌려 밤나무를 심었다.
“밤나무 그늘 밑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 많아요. 고사리·취나물·다래순·토란줄기·고구마순·무우청·머위순·인동초·둥글레·까치수염·비비추…”
김씨는 이 작물들을 부여군 공동브랜드 ‘굿뜨레’로 상품화시켰다. 장터를 열어 마을 특산물을 판매한 것은 호응도 좋고 수익도 높았다.
김씨는 또 틈새시장을 고민하다 원추리라는 마을 야생화를 발견했다. 긴 동면에서 깨어난 동물이 먹는 꽃이었다. 동면한 동물은 몸이 굳어 있어서 배설기능이 마비되어 있는데 이 꽃을 먹고 나면 이뇨작용이 촉진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주 예뻐 조경으로도 좋았다.
덕분에 마을 수익이 급성장했다. 현재 85개 농가가 이 꽃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 곳곳에 핀 야생화 덕분에 체험마을로 선정되면서 마을 이름도 새로 짓게 되었다.
현대 건설에서 다니다가 10년 전 고향으로 귀촌을 결심했던 나종년씨도 수익모델 창출에 집중했다.
“마을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것과 결부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마을엔 유명한 고찰인 ‘옥룡사’가 있어요. 이곳 도선국사 설화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득도를 하고 일어서면서 나뭇가지를 잡았는데, 그 나뭇가지에서 물이 나와 그 물을 드시고 바로 일어났다고 합니다. 바로 ‘고로쇠’입니다."
나씨는 고로쇠로 된장을 만들었는데 임산자원(고로쇠 물), 농산자원(콩), 수산자원(소금)을 제대로 이용한 상품이라고 강조했다. 고로쇠 된장은 연 매출이 2억이나 된다.
시골은 노력하면 그만큼 풍성함으로 선물한다.
2000년 SK에서 이사로 퇴직해 경남 하동에서 정착한 영진다원 손영기 대표는 귀촌한 지 7년째이지만 아직도 자신의 농사가 ‘서툴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한 해 녹차 농사는 3000만원 가까운 수익을 선물한다. 바쁜 수확기에는 동네 분들의 도움을 얻기도 하지만 수확 외의 생산은 전부 부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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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 나라 농촌의 현실은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젊은사람 없는게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어느 마을에 제일 막동이가 60세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을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더군요..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은 그래도 가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 동네가 늘어가는것 같습니다.

 

또 모두 힘들겠지만 나름 자리잡고 거뜬히 성공하는 사람도 드물게 보입니다.

 

길에서 호떡이나 토스트를 팔아도 1억 연봉자가 있듯이

 

귀농도 그런것 같습니다.  하기 나름이다..그런데 무척 힘들다.

 

어떤이들은 귀농해서 성공하기가 좀 과장해서 로또 복권 당첨되기 보다 더 힘들다고들 하십니다.

 

이말 은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닐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권하고 싶은 방법은 우선 주변에 귀농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많이 찾아 다니시며

 

 접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떤 동기나 기회가 올 것입니다. 반은 성공하신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거의 성공하셨네요..

 

 

 제일 위험한 것은 그냥 잘될거야 하는 생각입니다......막연히..........

 

귀농실패1호 ....조건..이란거.. 잘..아시죠.. 

 

우리 회원님들 중에는 단 1명도 이런 분 안계시길 바랍니다....


 

출처 : [Daum우수카페]귀농사모
글쓴이 : 수주팔봉 7017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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