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각하! 암을 정복했습니다”
“저는
암에 두 번이나 걸렸으나 두 번 모두 스스로 고쳤습니다. 15년 전에 목에 암이 걸렸지만 스스로 고쳤고 5년 전에 또 암에
걸렸는데, 이번에는 위와 장과 폐에 암이 생겼습니다. 약초를 구하러 높은 산을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두어 길 되는 높이에서
떨어져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적이 있는데, 일 년쯤 뒤에 다친 부위에서 암이 발생하여 위, 폐, 대장으로 전이한 것입니다. 저는
이를 암을 정복할 수 있도록 하늘이 내려 준 기회라고 생각하하고 온갖 치료법들을 연구한 끝에 마침내 약침 치료법을 개발하여 암을
고쳤습니다. 화를 복으로 바꾸고 마침내 세계에서 제일 좋은 암 치료약을 만들게 된 것이지요. 그 때 만든 주사약으로 병원에서
포기한 암환자를 많이 고쳤습니다.”
스페인 교포인
한동규는 평생을 암 치료약 연구에 바친 사람이다. 25년 동안의 연구 끝에 어떤 암이든지 초기암은 80-90퍼센트, 말기
암일지라도 수술이나 방사선치료, 항암제 치료 등을 받지 않았다면 70퍼센트 이상 고칠 수 있는 약을 만들어 냈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두 번이나 암에 걸려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온갖 실험과 연구를 거듭하여 자신의 암을
고쳤을 뿐 아니라 수많은 암환자를 고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치료법은 몇 가지 식물에서
추출한 물질을 종양이 생긴 부위에 주사하여 암 덩어리가 괴사되어 누런 고름으로 변하여 피부 밖으로 빠져나오게 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치료효과가 빠르고 치료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치료를 받는 동안 통증이 몹시 심하고 암 덩어리가
괴사되어 빠져 나온 자리에 큰 흉터가 남는 단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치료법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암치료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남미의 파나마에서 대통령
측근에 있는 암환자를 여러 명 고쳐 파나마 대통령의 주치의로 일하기도 했고, 스페인암연구소에서도 근무했다. 현재 스페인 자연요법 암
에이즈 마약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 중심가 소울 거리에 암을 비롯하여 난치병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98년 5월에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이 만든 암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여러 차례
대통령한테 보냈으며 99년 1월에 <대통령 각하! 암을 정복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지은이는 98년 12월 한동규 씨와 함께 스페인으로 가서 그가 운영하는 병원을 둘러보고 치료 중인 환자 몇 사람을 만나보았으며 함께 남미의 아마존 정글을 탐험하며 갖가지 약초를 채집하고 연구하였다.
여기
한동규 씨가 암 치료약 개발과정과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암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겪은 사연들을 그의 저서 <대통령
각하! 암을 정복했습니다>에서 요약하여 옮겨 싣는다. 이 책은 한동규 씨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지은이가 편집 출판한 것이다.
뒷부분에 구체적인 암 치료법, 진단법, 대통령한테 보내는 탄원서 등을 함께 실었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은 없다’는 명언을 남겼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보다 더 강력하고 깊은 뜻이 함축된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이 말은 우리 겨레의 마음 속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안 되면 되게 한다’는 결심을 마음 속에 심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교훈이 내가
암이라는 최고의 난치병을 정복하는 데 제일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25년이란
긴 세월동안 암을 정복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패와 고난이 있었습니다. 내가 만든 약을 직접 내 몸에 투여해 보고
탈이 생기지 않으면 암환자한테 쓰곤 했는데, 이와 같은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중고등학교 교사 노릇과 약국 경영
나는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더구나 암을 정복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그려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중고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일과, 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일, 의사나 약사도 아니면서 암 연구가라는 고된 길을 걷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취직한 곳이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에 있는 상동중고등학교였습니다. 대학 동창인 윤선준이라는 친구가 상동중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후임으로 나를 교장선생님한테 추천했던 것입니다.
영월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가
학교 비리를 척결하는 일에 앞장섰다가 학교 재단 측에 미움을 사서 쫓겨나서 서울로 와서 영어학원 강사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부의 학원탄압정책으로 학원이 문닫게 되어 학원 강사 노릇도 종말을 고하고 다시 실업자가 되어 무거운 마음으로 다른 살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축한 돈으로 일년쯤은 살 수 있으나 그 안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큰 일이어서 부지런히 일자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어느 날 시내를 돌아다니다 피곤하여 다방에 들어가 차를 한 잔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을 때
“야! 너 한동규 아니냐?”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고등학교 동창인 연영모라는 친구였습니다.
“야! 연영모 오랜만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어느 회사의 영업부장으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나한테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지나온 일을 이야기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불쑥,
“야! 너 약국 한 번 해 볼래?”
하고 물었습니다.
약국 경영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나의 딸이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구미가 당겼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아버지가 제기동에서 큰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도 생각났습니다.
“참! 네 아버지가 약국을 경영하고 계시지?”
“그래”
“지금도 잘 되냐?”
“지금 세를 놓고 있는데, 약사 녀석이 하도 속을 썩여서 내보내려고 하는 중이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너한테 주겠어.”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군. 내가 약사가 아니라도 괜찮을까?”
“염려하지 마라. 약사를 채용하고 운영만 하면 된다.”
암 치료법을 연구하게 된 동기
이렇게 되어 나는 약국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라 운명의 기구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25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암과 씨름하고, 마침내 암을 정복하게 될 줄은 그 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약국에 손님이 많아지자 때로는 밥
먹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서 잠자고 밥먹는 습관이 깨어지고 아무 때나 시간 나는 대로 밥을 먹고 잠을 자게
되자 몸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탈이 났습니다.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또 밥을 먹기만
하면 토했습니다.
약국에 있는 위장약이란 위장약은 전부 먹어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며칠이 지나자 탈진하여 자리에 누웠습니다. 이때 아버님께서 “이 약을 먹어봐라”고 하시면서 약을 주셨는데 꼭 토끼똥 같이 생긴 약이었습니다. 나는
“약국에 있는 좋은 약들을 전부 먹어도 안 되는데 이런 약 가지고 되겠어요?”
하고는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온 식구들이 걱정이 되어 병원에 입원을 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병원에서 주사를 맞은 후 쇼크를 받아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서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버텼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답답하셨는지 “얘! 고집부리지 말고 이 약을 먹어봐라.” 하시며 다시 토끼똥 같은 약을 내 놓으셨습니다.
형편이 다급하여 아무 말 없이
아버님이 주시는 약을 받아먹었습니다. 약을 먹고 두 시간쯤 지나자 속이 후련해지고 그렇게 괴롭던 모든 증상들이 깨끗이 사라지며
대변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화장실에 가서 변을 보고 나니 몸이 가벼워져서 곧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배가 쉬 고프고 밥맛이
꿀맛 같았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아버님! 이 약이 무슨 약입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박이봉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분이 만든 약이다.”
“그 분을 좀 만나 뵐 수가 있을까요?”
“만나고 싶으면 나하고 같이 가자.”
즉시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박이봉’ 선생님 댁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댁은 효창동에 있었습니다. 그 댁에 가는 동안 아버님께서는 그 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박이봉 선생님은 왜정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전금’이라는 국가 고시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은 단 한과목만 합격해도 신문에 대서특필할 정도로 어려운
시험인데 박이봉 선생님은 7개 과목 전체를 단번에 합격하여 전 일본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귀국 후 일본 총독의 비서로
취직했습니다. 기억력이 뛰어나 총독은 늘 옆에 데리고 다니며 도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어느 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다가 한의학에 도취되어 교장직을 버리고 한약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분이라는 것이 아버님의 설명이었습니다.
나는 박이봉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드린 다음,
“선생님께서 만드신 약의 효력이 참 좋습니다.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처방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차분한 음성으로
“처방을 가르쳐 드릴 수야 있겠습니까? 만약 약이 필요하다면 계속 대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부터 약국에서는 한약도 함께 취급하였고, 한약을 무시했던 태도가 잘못이었음을 반성했습니다. 또 이렇게 훌륭한 약이 그늘에 가려 있고, 별 효과가 없는 양약이 판을 치는 현실이 언젠가는 시정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약을 조제할 때 박이봉 선생님의 약을 몇 알씩 넣어 주면 지금까지 양약으로 고치지 못했던 질병들이 쉽사리 해결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청년이 약국에 왔습니다.
“아버님이 위암에 걸렸는데 혹시 좋은 약이 있으시면 주십시오.”
그때까지 위장병 환자는 자신 있게 고칠 수 있었으나 위암은 치료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이봉 선생님의 약이 암에도 효험이 있는지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약을 주었습니다.
며칠 후 그 청년이 다시 왔습니다.
“그 약을 드시고 나서 아버님이 식사도 하시고 일어나 거동도 하십니다.”
암환자가 호전되었다는 말에 몹시 기뻐했습니다. 암이 불치병인줄 알았는데 호전되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그 뒤에 췌장암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박이봉 선생님의 약을 주었더니 며칠 뒤에 다시 와서 통증이 줄어들고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로 인해서 박선생님의 약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이 약을 제약회사에서 만들어 공급하면 많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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