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스크랩] 아메리카 심봤다/이 일(미국)

그린테트라 2013. 3. 10. 03:23

아메리카 심봤다
                        이 일
  


   지천(智天)은 그의 호다. 지천과 나는 미주의 한 시문학 단체에서 만난 친구 사이다. 그는 문학적 취향이 나와 같고

나이도 비슷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뜻 친구의 예를 청했다. 나중에 내가 다니던 마라톤 클럽을 소개해서 함께

운동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IMF가 막 끝나고 911이 터진 이듬해에 하던 사업을 접고 맨손으로 미국으로 왔다고 했다. 엘에이에서

가족과 만나 서류상 E-2 비자를 받아 그때까지 합법신분만 유지하고있는 상태였다. 영주권이 있고 없고는 해외여행을

할 때 제약을 받을 뿐 밥벌이 해주는 일자리만 있으면 나머지는 둘째 문제라고들 한다. 지천은 영어도 제법 하고

그런대로 말끔한 용모여서 쉽게 세일즈 일자리를 얻어 2008년래의 불황에도 별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 그러던

그에게 몹쓸 습관이 하나 생겼는데 매일 저녁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건수가 없는 날에도 집에서 반주로 소주 한병을

훌딱 마셔버린다고 제수씨의 불만이 종종 터져나왔다.

주야장창 마셔제낀 술이 지난 1년간 소주 365병은 된다는 게 자타가 공인하는 숫자다. 역시 도가 지나쳤는지 지천은

류마티스 관절염, 허리 디스크가 왔다고도 하고 또 수개월 전에는 녹내장이 의심된다며 정밀검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병명이 나온 건 지난 해 9월, 그는 별일 없는 것처럼 시문학회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목이 메었다. 한 달 째 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요즘은 막걸리만 홀짝대더니 검사 결과 폐암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

이 무슨 소리고’하며 내 귀를 의심했다. 

“폐암이라고?” 
폐암은 그 증세를 자각하게 되면 보통 말기라던데...   

                                                                                                                                                                                                                                                                                                                                                                                                                                                                                                                                                                                                                                                                                                                                                                                                                                                                                                                                                                                                    

지천에게는 곱상한 아내와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함께 만날 때마다 참 현명한 아내와 과묵한 아들이 보기

좋았는데 호사다마라고 누가 그의 행복을 시기했는가. 하지만, 왜 하필 나냐고(Why me?), 그는 묻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이는 그는 그랬다. 그가  5년 전쯤에 담배를 끊으면서 100만불짜리 생명보험에 들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돈은 죽어야 나오는 것이고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미국의 건강보험은 3인 가족 기준 보통 월500불

정도 들기 때문에 그만한 형편이 안 되는 초기 이민자들은 아무런 의료혜택 없이 죽어가는 게 다반사다. 미국의

응급실은 몇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2,3만불이 청구되는가 하면 장기적으로도 중환자의 경우는 하루 입원비가

만불이 넘는다. 그래서 부동산이 있는 사람들은 우선 건강보험 부터 챙긴다. 의료 천국인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의 보험수가는 잘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연고 없는 멕시코에 가서 치료받기도 그렇고, 또 한국으로

가자니 가서 죽은 의료보험도 살려야 하고 누구에겐가 신세져야 하는데 한국정부는 그런 얌채 교포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9년전 지천은 처음 혼자 달라스 공항에 내렸다가 뉴저지를 거쳐 버지니아 시골로 내려갔다. 버지니아에서 1년을 보낸

후 아내와 아들이 한국에서 들어오는 시기를 맞춰 엘에이로 건너왔다. 그의 아내한테는 한국인들이 많은 엘에이가

처음 적응하는데 편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대로 무난히 몇 년을 잘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천은 한달에

한번 정도 여러 친구들을 초대해서 자기 집을 편안한 아지트로 제공하곤 했었다. 하지만 대개 이민  초창기 생활이

그러하듯 경제적으로 빠듯한 살림에 남편이 술자리라면 마다하지 않고 그린피도 감당이 안 되는 처지에 골프도 치고

또 고상하게 시나부랭이나 쓴다고 이 모임 저 모임에 쫓아다니는 걸 보는 제수씨는 항상  웃는 표정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 부부싸움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던 것같다.
돈이 조금 모이면 꼭 쓸 데가 생기는 게 보통 월급쟁이들의 생리지만 13년도 넘은 그의 낡은 자동차가 아직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참 신기했다. 지천은 음악을 좋아하는 아들한테 중학교를 다 졸업할 때까지 피아노 한 대 사주지 못 해

미안하다고 헀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의 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바깥으로 나돌지 말고 집에 취미 좀 붙이라고

1년 할부를 끊어 피아노를 사주었다.

지천은 글재주는 좀 있어서 미국에서 당당히 공모전을 통해 시로 등단했다. 한국에서 국어선생을 해야할 것을 미국에

와서 이러고 있다고 가끔은 후회하는 말을 했지만 그는 미국생활 자체에는 만족한다고 했다. 지천이 자기 혼자만  

하고 싶은대로 즐기며 사는 것이 항상 제수씨에게는 불만이었지만 제수씨도  몇년 전부터 매주말 함께 달리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고부터는 집에 불러들이는 멤버들도 어차피 서로서로 잘 아는 터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지천은 그의 시에 잘 나타나는대로 경험주의자다. 그는 혼자서도 몇날 며칠 사막을 여행하기도 하고 수석을 한답시고

물줄기란 물줄기는 다 뒤져 결국 요세미티 협곡에서 <고래심장>이라 이름 붙인 미군수박만한 형상석을 캐오기도 했다.

두세시간이면 갈 수 있는 모하비 사막에서 고양이만한 토끼를 보았다고 하면서 이곳 저곳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궁금해했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그의 유해를 매주 달리는 엘에이 한복판의 공원과 사막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시 속에

남겨두곤 했다. 

시문학회 모임 때 그가 발표한 것 중에 이런 시가 있었다.


마지막 詩

                         
절망이 앞을 가려 결국 죽어야한다면
나는 홀로 떠나리라
유언처럼 되뇌었습니다
내 육신이
더 이상 나를 부지하지 못 할 때
걸리적거리는 것이
어찌 내 몸 하나뿐이겠습니까
남아있는 妻子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다면
나의 흔적 조용히 거두어가겠습니다

행복에 겨워 80을 산대도 좋지만
온전히 죽지 못 하고
오히려 사는 게 족쇄(足鎖)가 된다면
차라리 
말없이 떠납니다
더위에 강하니 모하베 사막으로 갈지
낙하산 메고싶던 하늘로 갈지
눈 덮인 휘트니山으로 갈지

그래도 적막한 물속엔 무서워서 못 가겠고
제발
졸지에 죽게 해주세요

아빤 우리 공주가 이뻐 죽겠거든
여보,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어
사랑을 등지고
내 떠나는 날
비로소 이 詩가 완성되는 날

 

 

며칠 후 지천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집을 나가겠다고?”
“응, 동부로 간다.”
“야, 니 어떻게 할라고---“
“그냥 산에 들어갈려고 해. 버지니아 산에 가서 움막 짓고 뱀 잡고 산삼이나 캐지 뭐. 너 전에 나랑 산삼 두 뿌리씩

나눠먹고 체온이 올라갔다며”
“참, 그게 어디 쉽나, 산 속에서”
“그렇긴 하지만”
“좀 생각 좀 해보자. 내가 좀 알아볼께.”

지천에 대한 얘기를 와이프한테 했을 때 금새 와이프의 눈이 젖어들었다.
“지천이 버지니아 산 속으로 들어가겠다는데 나라도 좀 같이 가고 싶긴 한데...거기서 죽든 살든 한 두어달은 걸릴

텐데...”

순식간에 소주 몇 잔이 넘어갔다.
“그래, 당신이 당분간 내 일 좀 카바해주면 안 될까? 그 놈 혼자 가서 어떻게 하겠다고...”
나는 기어코 아내의 승락을 얻어내고야 말았다.

최근 미국 산삼채취량은 연간 10톤이 넘는다. 산삼은 주로 중부와 동부 애팔레치안산맥 일대, 그리고 록키산맥에서도

일부 채취되는데 가장 가깝고도 많은 산삼이 나는 곳중의 하나인 중부의 아칸사스주가 눈에 들어왔다.  거리상으로는

매일 600마일씩 3일을 꼬박 달려야 할 곳이었다.
나는 지천을 설득하여 버지니아보다 가까운 아칸사스주로 함께 가기로 하고  산삼채취 시즌이 시작되는 열흘 후로

출발 날짜를 잡았다. 아칸사스주의 산삼 시즌은 9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다. 별도의 퍼밋은 필요 없고 아무 국유림에서

나 열매가 빨갈 때 3지 이상만 캘 수 있다. 열흘의 시간을 두고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모아나갔다. 한국에서 발행된

약용식물에 관한 것은 물론 영어로 된 북미 약초 도감을 구했다. 몇년째 동호인들과 함께 채심여행을 떠나는 오렌지

카운티의 한 한의원장님이 쓴 경험담도 꼼꼼히 살펴보았고 전화통화로 자문을 구했다.
장비 목록을 작성해보니 한도 끝도 없다. 장화, 망사자루, 고도계, 야전삽, 그 밖에 몇권의 책과 반칠환의 시집 등을

챙겼다. 우리 집 강아지 미키를 데려갈까 하다가 그만두었고 작년에 한국에서 공수해온 어항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큰 뜰 채 하나를 챙겼다.
산삼잎과 줄기를 구별하는 방법과 산삼이 있을만한 지형을 읽어내는 일 등을 머릿 속에 반복해서 주입시켰다.

시즌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지천과 나는 내 4륜구동 랜드로버를 타고 출발했다. 40번 프리웨이를 타고 아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그리고 오클라호마를 지나 미시시피강의 지류인 아칸사스강까지 가야하는 1,650마일의 여정이었다.

잠만 프리웨이를 벗어나 가까운 마을에서 자고 그렇게 서두를 일도 없이 3일째 되는 날 오크라호마 시티를 출발하여

점심 때가 다 되어 아칸사스 주와의 경계를 넘었다. 포트 스미스(Fort Smith)를 지나 좌측으로 오자크 국유림

(Ozark National Forest), 우측으로 오우아치타 국유림(Ouachita National Forest)인데 호수가 있고 물줄기가 발달한

오우아치타 국유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숲을 관통하는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천천히 지형을 살폈다. 물줄기와 호수,

그리고 나무의 종류를 먼저 살폈다. 주위엔 별로 높지 않은 능선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십여마일

더 내려가면 인디안 보호구역이 나온다. 어쩌면 인디안 심마니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긴 어떠냐?”
지천은 한참 지도를 보다가 계곡쪽으로 흘러내려가는 길을 가리켰다. 찾고있던 호수 근처였다.
“이리 한번 가보자.”지천이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그래볼까?”
밑도 끝도 없는 그 길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뻗어있는지 그런 건 지도에 나와있지 않았다. 길가에는 자리공이 잘

자라고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운 자리공의 자주색 열매가 마치 포도송이처럼 맺혀있었다. 낡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산림법에 의거 선착장을 폐쇄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시 날짜는 천구백 몇년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차가 웃자란 풀들을

때리며 지나갔다.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렸다. 차가 물웅덩이에라도 빠지는 날엔 정말 낭패일 것이었다. 멀리 호수 하나가 나타났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그리고 동서로 가로지르는 강이 연결된 호수를 둘러싸고 여러개의 능선이 오버랩되어 시야에

들어왔다. 능선 너머 멀리 봉우리 몇개가 보였지만 그리 높아보이지는 않았다. 
선착장 빈 공터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그냥 주위를 한번 둘러보기로 하고 작은 냇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굵은 참나무가 많았고 후박나무, 자작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자라고 있었다. 좌우 경사진 곳에 낙엽이 많이

쌓인 곳은 발이 푹푹 빠졌다. 물가를 벗어난 푸석푸석한 바위 밑에 흙무덤이 쌓여 아래로 흘러내린 게 보였다. 그 위에

동굴이 하나 눈에 띄었는데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 한 크기의 입구가 보였다. 주위엔 덩쿨 식물들이 잡목과

얽혀 있었고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는 회백색 버섯들이  눈에 띄었다.  
차 옆에 텐트를 쳤다. 심마니들은 도움이라 해서 나뭇가지와 비닐을 이용한 간이 시설을 만들지만 우리는 좀 더

튼튼한 잠자리가 필요했다. 미국의 북쪽 산간지대에 오두막집 하나 구입해서 살면 어떨까 하고 가끔 생각하곤 했다.

외로워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외진 산속이라도 텃밭을 좀 가꾸어 삼이라도 좀 심고

산나물과 버섯을 따고 물고기도 잡고 하다보면 좀 견딜만 할 것도 같았다. 평소 사냥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곰이라도

한마리 내려오면 한 서너달 식량으로 반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지고 간 음식들을 정리해보니 한 보름치 식량은

너끈할 것 같았다. 누룽지, 콩가루, 건과류, 말린 과일, 장아찌 등은 오래 두고 먹어도 될 것이고 다만 한동안 김치 없이

버텨야 할 것이다.
날고구마와 과일로 저녁을 때우고 6시가 채 안 되어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스버너를 켜고 이야기를 하는 둥 책을

읽는 둥 하며 종이에 엉뚱한 생각들을 끄적거리기도 하다가 일찍 슬리핑백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5시가 

안 되어 저절로 잠에서 깨었다. 조금 어둑어둑했지만 곧 날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호숫물에 목욕하는 일이었다.

미국생활 20년 동안 냉수로 목욕한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 했었다. 우리는 수건

한장씩 들고 호수로 내려가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맛사지를 하며 몸을 씻었다. 9월초 숲속의 새벽 기온은 화씨 58도

안팎이었다. 계곡에 가서 1갤런 통에 물을 받아왔다.
아침 식사 후 작은 베낭에 도구들을 각자 챙겨 넣고 긴바지에 긴팔 옷을 입고 산으로 향했다. 산삼도 산삼이지만

버섯이나 산나물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뭐가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식물도감의 사진과 비교해

보아도 확신이 서지 않는 이상 함부로 먹을 수는 없었다. 다만 고사리와 느타리버섯은 쉽게 알아봤다. 고사목에는

여러가지 버섯들이 붙어있었는데 보기에도 딱딱해서 먹을 수 있다해도 차로 끓여먹어야 할 것들이었다. 일명 검둥이라

불리는차가버섯만은 직접 우려내어 먹어본적이 있어서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첫날 얻은

수확이라면 고사리와 크리스마스 혼을 발견한 것 뿐이었다. 그리고 지천이 생각보다 잘 따라왔다. 그 정도 체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이롱 환자 아니냐고 놀림 받을만 했다. 산에 도착해서 약간 기침이 줄어든 것도 같았다.
저녁에 텐트로 돌아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빨래였다. 무조건 한번 입은 것은 벗어서 빨기로 했다. 내가 빨래를 해오는

사이 지천은 음식을 준비했다.  과일과 견과류, 고구마를 먹으면서 제일 피하고자 했던 것은 과식이었다.  수면을

방해하여 다음날 아침식사까지 거르게 하는 과식은 건강 제1의 적이었다. 적어도 그와 나의 체질상으로는 그랬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의 하나는 함께 있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채식을 같이 하기로 했다.

가지고  간 생식 제품이 있었지만 직접 채집해서 자연식으로 먹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이틑날도 허당이었다. 확실한 먹거리는 고사목에서 딴 느타리버섯 정도였다.  다른 큰 소득 없이 돌아와 현미잣죽과

마른 반찬을 먹었다
처음부터 육류는 금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은 간절했다. 특히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다. 계곡 작은 폭포에 무지개 송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가져온 뜰채로 뜨면 다 떠질 것이었다. 나와 지천은 생선 매운탕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참기로 했다.

호수에 어항을 담그면 꽤 많은 물고기를 잡아올리겠지만 어항이 법적으로 허용이 되는지는 쉽게 확인이 안 되었다.

일단 모든 고기맛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콩을 볶아서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씹으며 걸었다. 낮에 산에서 크고 검은

얼룩이 짙은 뱀을 발견했지만 잡지 않았다. 방울뱀 정도라면 잡아서 통째로 푹 고아먹으면 몸에는 좋을 것이지만 

살생은 가급적 피하기로 했다.

한가지 예외가 있다면 벌집을 발견하면 어쩔 수 없이 벌들을 죽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3일째 일어났다. 바위밑 흙과의 틈새에 벌들이 드나드는 것을 발견했다. 땅벌이었다. 망사모자를 쓰고

거의 화생방 훈련 복장이 확인되자 모종삽으로 열심히 흙을 떠내었다. 벌들이 계속 공습을 했지만 내가 만든 철망과

그 위에 덮은 나일론 망사는 빈틈이 없었다. 수십마리가 넘는 벌들이 붙어있는 석청을 비닐 봉지로 포위해서 들어냈다.

2킬로쯤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벌집 입구를 잘 봉해주었다. 석청은 우리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 한번 끓여서

건더기를 걷어내고 맑은 꿀을 한 통 쯤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일주일째 산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지천이 잘 따라오는 것이 신기했다. 물병을 하나씩 뒤어차고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처음엔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녔다. 동향이나 북향, 활엽수가 많은 곳, 습기가 있으면서도 배수가 잘

되는 곳, 작은 나무 열매들이 있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삼은 땅 속에서 2-3년부터 30년까지 휴면하는 경우가 있다.

잠을 자주 잔 산삼은 한 줄기의 뇌두에 뿌리의 몸체가 여러개 붙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뇌두에 싹이 나오지는 않지만

뿌리는 땅 속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산삼은 기후와 토양이 변하고 적당한 수분이 유지되지 않으면 봄이 되어도 잎과 뿌리를 내지 않는다.
아, 그렇구나.  처음 도착해서 산신께 치성을 드리지 않았네. 문득 생각난 김에 촛불을 켜고 비프저키를 놓고 냉수 석

잔을 올리며 무탈한 산행과 몇 점 산삼을 주시기를 빌었다.
  “야, 우리도 산삼 만나면 심봤다, 하고 외쳐야 되냐?” 다음 날 산행에 나서면서 지천이 말했다..
  “너하고 나하고 단 둘인데 왜 그래야 되지? 이 거 다 내꺼니까 다들 손대지 마, 그런 뜻 아냐? 이러다가 산삼은 커녕

쥐뿔도 구경 못 하겠다. 그래, 더덕공주라도 만나면 좋겠다...”
 지그재그로 갔던 길을 또 가고 새 길을 가보기도 했다. 호수는 저 멀리 안개를 피워올리고 있었는데 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산이나 그렇듯 정상에는 억새풀과 키작은 나무 군락이 있었다. 멀리 능선과 능선이

겹쳐졌다.

길도 없는 길을 지천은 두시간이나 잘 따라왔다.
구름이 곧 내려앉을 것 같았다. 이곳 날씨를 잘 모르는지라 그냥 내려가는 게 나을 듯 싶었다. 한 8부쯤 내려왔을까.

계곡을 따라 거의 뛰다시피 내려오는데 잠시 지천이 샛길로 빠지는가 싶더니 “심, 심봤다!”하고  소리를 질렀다.

바지를 추스리다 말고 지천이 환호성을 질렀다. 떼심밭이었다. 옹기종기 열댓그루가 넘었다. 삼대는 곳고 열매는 눈먼

까마귀도 욕심 부릴만한 짙은 빨간색이었다. 3구와 4구가 섞여있는 4대 가족삼이었다.
  “봐라, 4지 5엽이면 1타 4피 아니냐.” 지천이 아는 소리를 했다.
뿌리가 잘 끊어지지도 않아서 삽을 안 쓰고도 잘 캘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뇌두가 새끼줄같고 회백색이었다. 두 시간에

걸쳐 굵은 것만 열 아홉 뿌리를 캤다. 아직 어린 것 몇은 그대로 놔두고 산짐승이 잎을 따먹은 것 서넛은 며칠 후 다시

와서 캐기로 했다. 씨앗들을 주위에 묻어주고 다음에 오면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궁리하다가 고도계 위치를 확인하니

1,950피트. 작은 물줄기 옆이라 그렇게 찾기에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삼을

점지해주신 산신도 조금 아쉬웠던 모양이다. 내일 삼에 이끼라도 덮어주리라 생각했다.
큼지막한 뿌리 하나를 잘 씻어서 지천에게 권했다. 간절히 기도했다. 지천아, 이젠 살 수 있어. 꼭 이것 먹고 살아나야 돼.

지천은 천천히 꼭꼭 한 뿌리를 잘 씹어먹었다. 나도 중간치 한 뿌리 맛을 보았다. 집에서 소식 기다리고 있을 생과부

생각이 났다. 딸의 얼굴도 환하게 떠올랐다.
책을 뒤져보았지만 하루에 몇 뿌리의 산삼을 먹으면 되는지 써있는 것이 없었다. 지천은 일단 매일 한 뿌리씩 날 것으로

먹기로 했다.
그날밤 나는 약간 몽롱한 상태를 경험했다. 지천은 몸에 열이 난다고 했다. 명현반응이었다.
그날밤 지천은 내게 시 한 수를 보여주었다.
 

옥주*

 

스스로 제 뿌리를 자르고 동면(冬眠)에 들어간 산삼(山蔘)은
눈 녹고 물 빠질 때를 보아
뿌리를 낼까 잎을 낼까
定한다고 한다
땅이 너무 질면 그 다음 겨울까지
아예 깨어나지 않는다는데
스스로 잘라버린 뿌리에서 새 뿌리가 나고
그 사이 10년, 20년, 혹은 100년근이라 불리는
나이테가 생긴다는데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이 다
모질게 잘라버린 尾(꼬리) 때문이라 한다
오래된 삼(蔘)일 수록 꼬리 자르는 일에 이력이 나는 것처럼
몸을 가볍게 하신
아버지
천 년 잠에 드신다
 
옥주*   山蔘이 겨울을 보낼 때 스스로 뿌리를 자르고 동면에 들어가 봄에 다시 뿌리가 나올 때 생기는 흔적


그 다음날은 곧장 능선까지 올라가는데 한시간 20분 밖에 안 걸렸다. 처음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체 얼떨결에 정상에

다다른 것이었다.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마구 뛰어올랐다. 능선 조금 아랫쪽을 지그재그로 살피다가 버섯을 여럿

만났지만 식용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아 그대로 두었다. 몸은 땀에 젖었고 텐트로 내려와서는 다시 힘이 났다.

지천이 호수에 목욕하지고 하길래 처음으로 풍덩 몸을 담갔다. 쌀쌀한 기온을 간신히 버틸만 했다.
며칠을 산에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지천은 매일 산삼 한 뿌리씩을 먹었는데 며칠 후 입술에 물집이 생겼다. 지천은

매일 혼자 호수에서 목욕을 하곤 했는데 몸에서 나는 열을 식히고 와서 잠에 들곤 했다. 그래도 물집은 다른  부위로

번져나가고 지천은 더운 콧김을 뿜으며 밤마다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기운이 없어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산

정상까지 뛰어올랐다 내려오곤 했다. 입 주위가 다 헐어서 제대로 먹지도 못 할 지경이 되었는데 삼은 열심히 씹어

먹었다. 짓물러진 얼굴의 물집을 따주고 소독약과 연고를 발라 붕대를 감아주었다. 지천의 얼굴은 미이라가 되었다.
“난 참 이기적이었어. 집사람은 참 잘 참는 성격이지. 그래서 고생이 더 길어졌고. 난 미국에 와서 별로 불편한 게 없는데

집사람한테는 제대로 해준  게 없네.” 그렇게 말하는 미이라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십팔일째. 북쪽 능선을 타고 더 멀리 가보기로 했다. 능선을 타고 한시간반쯤 가면 샛강이 보일 것이었다. 아직 붕대를

풀지 못 한 지천의 얼굴은 가면을 쓴 광대같았다. 광대와 나는 사냥꾼과 마주쳤다. 산속에서 낮선 사람을 만나는 건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애써 발견한 심밭을 고스란히 빼앗기는 경우도 있겠고 더군다나 사냥꾼들은 오발사고를

내서 종종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두 명의 백인 사냥꾼들은 간단한 인사만 하는둥 마는둥 스쳐지나갔다. 아랫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파장이다 싶었지만 호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서 훑고가볼 생각이었다. 그때 지천이 “잠깐만” 하면서 약간 북쪽의

경사진 곳으로 달려갔는데 똥이라도 눌려나 하고 생각했다. 5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지천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지천아, 뭐하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북쪽 도로 방향으로 내려뻗은 아래 능선이었다. 사냥개들 소리는 들렸지만 이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지천이 거기까지 내려갈 리는 만무였다.
거의 세 시간 정도 산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사냥꾼들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참으로 희안한 일이었다. 그렇게

가파르거나 험한 산도 아닌데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지다니. 정말 모를 일이었다.

텐트 근처에서 첫날 보았던 동굴은 박쥐굴이었다. 회색 박쥐들 수천마리가 떼지어 날아가는 게 마치 철새들의 이동

같았다. 지천은 돌아오지 않았다. 랜턴을 들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방향 감각도 없고 높낮이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아

헛발질을 하기 일쑤였다. 다시 계곡을 따라 물가의 돌을 딛으며 때로 막힌 숲을 뚫고 지나갔다. 어둠이 짙어졌다.

산짐승의 움직임은 없었다.

기껏해야 들쥐나 다람쥐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산의 밤길에서는 짐승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섭다고 하셨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그건 아버지의 6.25 때 일이었다. 어떤 움직임이든 그게 지천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시간반 만에 다시 산 정상에 다다랐다. 저녁 여덟시가 되어갔다. 멀리 타다 남은 놀이 검은 구름과

섞여 먼 산을 에워쌌다. 건너편 능선을 비춰보았다. 잔잔한 바람만 일었다. 천천히 능선을 타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능선은 잡목이 적어 오히려 걷기에 편했다.

낮에 왔던 강이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 “지천아! 지천아! 어디 있니?”
그 자리에서 밤새 기다려야 하나, 망설임 끝에 한 삼십분을 앉아있었다. 랜턴 불빛이 희미해졌다. 길이 엇갈려서 지천이

지금쯤 텐트로 돌아가 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나뭇가지에 긁히고 넘어진 상채기가 쓰라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찻길로 내려갈 수 있는 방향은 낮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그렇게 경사가 심하지 않았고 강쪽이 더 가파르기는 해도 

무엇이 굴러떨어지거나 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 했다. 

다음날 살림을 챙기고 차를 뽑아 북쪽 강 일대까지 반경 15마일 도로주변을  찾아보았다. 햇살에 나뭇잎이 반짝이는

아침 숲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았다.  산림관리 사무소를 찾아갔다. 아칸사스주의 서쪽 중앙을 차지하는 두개의 큰

국유림을 좌우에 두고 40번 프리웨이 부근 강가에 있는 관리사무소를 찾았을 때가 아침 9시였다. 관리소 직원은

전화와 무전을 번갈아 써가며 서너군데 연락을 취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구조대원들이 차량 3대로 도착하고 헬기

한대도 도착했다. 구조대원들에게 어제 일어난 상황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지천이 썼던 모자 하나를 주었다.

탐색견을 이용할 모양이었다. 나도 함께 따라나섰다.

4개조로 나뉜 탐색은 연이틀 계속되었다. 산이 그리 험하지 않으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켜주는

대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산에 사슴은 물론 흑곰과 카요테가 가끔 나타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둘째날에 강이 보이던

능선에서 바위를 타고 경사가 심한 비탈로 4,50미터 내려갔을 때  나뭇가지에 묶어놓은 손수건 하나를 발견했다.

지천의 것이었다. 그 방향은 강쪽이었다. 강에는 나무로 만든 선착장이 있을 뿐 배 한 조각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구조대가 더 이상 찾아볼 곳이 없다고 포기 선언을 했을 때 나는 지천의 손수건을 다시 살펴보았다. 지천이

왜?  

   1년이 조금 넘어 법적으로 실종이 확정되자 제수씨는 지천의 생명보험금을 청구했다. 그의 손수건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괴로웠지만 그는 일찍이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 아닌가. 보험금이 나오자 제수씨는 절에 가서 천도제를 지냈고

간혹 마라톤 모임에 나오기도 했다. 그 뒤로 한 동안은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제수씨가 오렌지 카운티에 집 한 채를 사고 커피숍을 내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지천이 평소 내개 했던 말을

되새겨 주었다. 지천은 시집 한 권 내기를 정말 바랬었다.
나는 요즘 그의 유고 시집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지천이 그의 인터넷 카페에 차곡 차곡 쌓아두었던 시들과 그가

찍어서 CD로 구워놓은 사진들을 함께 엮고있다. 시집 맨 마지막에 넣은 시는 이렇다.

 

나는 모르는 일
                                  
 
 
화석이 되어
한 세월 뒤에 깨어나면
미이라처럼 말라비틀어진
그 형상의 나를 생각하면
이백여섯 개
뼈들의 흩어짐을 생각하면
그저 그뿐
차라리 흙으로 부서져
거름으로 꽃을 피우거나
바다에 스며들어 고기 밥이 되었다가
항문에 붙어 길게 늘어졌다 다시
물고기 밥이 되거나
사막의 모래 속에 끼어들어
그냥 먼지로 날렸다가 건더기로나 건져져
새들 모래주머니 속에 비벼들거나
 
그저 그뿐
나는 모르는 일

 

<에필로그>
그래도 나는 안다. 그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것을.  `

출처 : [Daum우수카페]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
글쓴이 : 이 일(미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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