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스크랩] 고두미의 다마금多摩錦 이야기

그린테트라 2012. 2. 8. 18:20
고두미의 다마금多摩錦 이야기
농촌은 또 하나의 "내부 식민지"

 

신동혁 redweeds@hanmail.net

 

 
요즘 쌀농사는 농촌의 주수입원으로 농업시장개방 가운데서도 쌀시장개방을 막으려고 농민들은 모든 힘을 모으고 있다. 오는 11월 19일에도 여의도에서 시장개방으로 절벽 끝에 몰린 농민들이 생존권을 지키고자 모일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시장개방을 한편으로 막아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력농산물인 쌀의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해 온갖 지혜를 모아내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품질의 쌀을 생산하고, 그 쌀에 고유의 상표를 붙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에 가보면 브랜드가 너무 많아 선택을 방해할 정도이다. 부가가치를 높이고자 했던 쌀의 브랜드화가 이제는 옥석의 분간을 가로막아 역기능을 초래하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런 가운데 소수의 농민들은 재래종 또는 토종벼를 심어 나름의 성과(높은 수입)를 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재래종 가운데 하나가 다마금이다. 다마금이 고두미(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북 정읍의 박문기씨가 연변에서 구해와 농사를 짓던 것을 고두미에 사는 리신호씨(충북대 농대 교수)가 구해와 4년 전부터 심기 시작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다마금은 일제시대 산미증시계획기인 1915년에 전체 벼경작면적 가운데 1.1% 정도를 차지했다가 1925년을 11%를 정점으로 해서 계속 줄어들다가 1937년 4.8%로 감소했다. 그러다가 아마 이후에는 거의 짓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마금의 특징은 비료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으며, 키가 어른 가슴 정도로 크고 수염(벼 꺼시락)이 매우 길고 미질도 좋다. 비료를 주지 않아도 되기에 척박했던 개간지에 주로 심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수염이 길어 새피해가 거의 없었다. 옛날에는 새를 �기 위해 학교를 파한 학동들이 논둑에서 훠이 훠이 하는 풍경이 있었다. 비료가 금비라 할만큼 비싸고, 새 피해 컸던 그 시절에다마금은 분명 좋은 품종이었던 같다.
그래서 리신호씨로부터 나도 다마금을 얻어 함께 모내기를 했다. 여름에 벼꽃이 피면 온 논이 하얀 갈대꽃이 핀 것처럼 고왔다. 그러다 그것이 여무는 가을이 오면 자주색 저고리로 바뀌었다. 황금들녘에 자주색 저고리가 하늘거리는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에 발생했다. 콤바인으로 탈곡을 하는데 수염이 너무 길어 기계고장의 원인을 제공했고, 서로 엉켜 곡물탱크에서 벼포대로 나락이 내려오지 못했다. 기계 주인의 불평이 컸다. 그래도 유기농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잘 크고 미질도 좋아 다마금을 포기하기에 기계주인의 불평정도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해에도 둘이서 또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계 주인이 베어주지 않겠다고 버텼다. 사정사정하여 베었다. 다음부터는 짓지 않겠다고 말하고 나서. 하지만 리신호씨는 탈곡기를 구입하여 손으로 베고 손으로 탈곡하면서 다마금을 포기하지 않았다. 토종 종자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올 해 결국 리신호씨도 그만 두기로 했다.
기계화가 되면서 농사 환경도 많이 바뀌고 있다. 농촌에 일손이 부족해 기계화는 어쩔 수 없는 대세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세로 인해 많은 농지들이 한계농지가 되어 묵어가고 있고, 기존의 기계와 맞지 않은 종자는 사라지고 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종자에 맞는 기계가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가 수입되고, 거기에 농사를 맞춰가야 하는 것이다. 농촌은 1945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이후 다시 "내부식민지"로 전락된 것 같다. 다마금의 운명은 농촌의 그런 사정을 극적으로 보여준 많은 사례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출처 : 돌터, 石基!
글쓴이 : 김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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