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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의 변천과정 - 성경책이 만들어 지기까지(참고하세요)

그린테트라 2011. 8. 3. 01:38

 

성경의 변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이 세상에 나타난 종교 중 가장 완전한 종교이며
성경을 하느님이 직접 내려주신 절대적 진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사해성경의 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이 만들어진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며
기독교의 역사 또한 정치권력 못지않게 
환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주장이 성경을 신앙의 뿌리로 삼고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근원인 성경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기독교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지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사실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시대상황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이 태어난 기원 전후의 시기는 절대적 무력을 가진 로마가 
유럽과 근동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시대로 
유대사회 또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수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사회는 이민족의 잔인한 지배에도 불구하고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의지하는 원시신앙의 질곡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유대사회는 무지와 미신이 넘쳐나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의 절대적 권위로 인해 인간성은 유린당하기 일쑤였으며
사람들은 인간적 미덕과 신뢰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들의 위선됨과 사악함은 예수님이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은 행적에서도 잘 알 수 있고
예수님이 형장에 섰을 때 로마 총독이 
유월적 특사로 한명의 죄를 사해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대신 살인자 바라바를 선택함으로써
진리와 신성을 버리고 어둠과 악마의 편에 섰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의지하여 여호와를 섬기던 타락한 원시종교의 실체였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어서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실천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알려주신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 속에 진실이 있어도 맑은 마음과 바로 보는 눈이 없으면 
그것은 진리의 기준이 되지 못하며 참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일에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우며 위선과 무지를 행하던 유대민족은 
구약에 근거하여 생활했음에도 하느님의 참뜻을 알지 못했고 
진리와 인간이 가야할 참된 삶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성과 구원의 빛인 예수를 죽이고
그 비양심과 배덕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돌며
모든 민족의 불신을 받는 유랑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도 잘못 이해하면 오히려 자신과 세상을 망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들이 세상의 거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몰라서 고통을 자초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럼 예수님의 가르침인 신약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예수님이 직접 기록하신 것일까? 아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뜻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을 참된 삶으로 인도하고자 
태초부터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와 완전한 하느님의 뜻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분의 맑게 개인 마음에는 오직 하느님의 참뜻과 진리만이 비치고 있었고 
어두운 세상과 불쌍한 중생을 위해 인간이 가야할 참된 길을 전하기에 바쁘셨기에
교회와 신약이라는 형식에 대해서 생각해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기록문화가 발전하지 않았고 전도의 길이 매우 험난했기 때문에
재세시 그분의 말씀은 오직 제자들의 마음속에만 기억되고 있었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단편적인 경전으로 편찬되다가
AD 376년 아나타시우스에 의해 현재의 신약 형태가 정립되고
이를 기존 유대교의 구약과 함께 기독교의 양대 축이 된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가 신구약 성경의 이대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전혀 예수님의 뜻이 아니며 제자들의 전도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후대에 인위적으로 정리되어 편집된 것이다.
초기교회에서 사도들은 유대민족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종교적 배경인 유대교의 구약을 기본 경전으로 사용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구약을 근거로 하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탄생한 것이다.
예수님 사후 제자들은 신성의 빛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진리를 전하려고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종말의 시간을 기다리며 최후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종말론적 기대감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종말의 구원보다는 전도에 힘을 쓰게 되었고 
그 필요성에 의해 각 교파마다 나름대로의 성서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만들어진 성경들은 각 사도들의 체험과 이해정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으며
말로 전해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변질과 왜곡이 일어났다.
그런데 근래에 발견된 사해문서와 낙 함마디 문서의 발굴로 인해, 
초기교회가 종말론적인 영지주의적인 성격을 많이 지녔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교파들 간에 
각각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들이 난무했으며 교세다툼이 치열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이때의 초기 신약이 수록된 희랍어 사본이 약 5천여개, 
번역 사본들도 약 1만개 정도 보존되어 있으며 교부들의 인용문도 수천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원형은 AD170년경 무라토리 정경목록으로 나타난다.
이 정경목록에는 현재의 신약 27서 중에서 
베드로 전,후서,야고보서, 요한3서, 히브리서가 빠져 있는데 
이러한 경전들은 오랜 동안의 교리적 투쟁을 거쳐서 나중에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AD367년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같은 목록을 제시했는데 오거스틴도 이 정경목록을 지지했다.
이것이 제롬의 라틴어 번역(Vulgata)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됨으로써
현 성경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현재의 성경 속에
베드로를 제외한 12제자의 전도활동이 매우 미미하며 
육체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주역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큰 비밀이 숨어있는데 그것은 바로 
후대 사도들간의 교리다툼에서 바울파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측에서 정경으로 채택하기를 거부한 외경에는 
많은 사도들의 행적과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교리다툼에서 바울파에게 졌기 때문에 
현재의 성경에서 이들의 경전이 제외되어 현 기독교에서 그 행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외경에는 베드로 복음, 베드로계시록, 베드로행전, 요한행전, 
도마행전, 안드레아행전, 에비온복음 등이 있다.
예수님 사후 로마사회나 유태사회는 몹시 혼란스러운 시대로, 
새로운 가치관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여기저기 많은 사도들과 교회가 나타나 서로의 교리를 비판하며 교세를 키우고 있었는데 
바울도 그러한 사도들 중 하나였다.
그 당시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단계라 서로간의 교리논쟁과 인신공격은 치열했으며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분열상은 현 기독교의 분열상 보다 훨씬 더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당시 쌍벽을 이루던 "아볼로"와 같은 사도들과 교세다툼을 했는데 
할례파 사람들과 함께한 베드로에게 위선자라고 비난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교파들 간의 다툼은 『고린도 전서』에도 잘 나와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헬라어로 베드로)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 전서 1장 11~12절]
이처럼 교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여러 파로 나누어 분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바울이었으며 신약의 4/1을 차지하는 바울서신들로 인해 
우리는 진정한 최고의 사도가 당연히 바울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본적이 없는 제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바울파가 승리했지만 예루살렘에 근거지를 둔 정통 베드로파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초대 교황으로 추인되고 천국의 수문장이 되는 전통이 생긴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히브리민족에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교가 된 곳이 이스라엘이 아닌 로마제국이었기에 
이방지역인 서구 사회에서 결국 바울파가 정통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후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와의 삼위일체 논쟁 때문에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자
기독교를 국교로 선택하여 황제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을 정통으로 채택하고 
하느님과 예수를 별개로 보는 초기의 정파인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아 파문시켜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면직된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을 추방해 버렸는데 
이처럼 세속적 권력이 교회 문제에 개입하는 전례를 남김으로써 
그 후 종교는 정치 권력의 영향력에 휘둘리는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로 알고 있었지, 
하느님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즉 예수를 신의 독생자로 모든 창조물 중에 으뜸이요, 모든 선지자 중에 으뜸인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여 스스로 하느님과 다름을 밝혔으며
*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장 46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하는 구절 등에서도 
자신과 하느님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속에 육체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의 가르침이 정통이 되고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대변했던 아리우스파가 이단이 되며,
관념화된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이 로마황제의 신성 통치를 위한 
핵심교리로 채택되는 사례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이 일점일획의 어김이 없는 성령의 말씀이 아니라 
현실권력과의 타협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적 산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진실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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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um우수카페]귀농사모
글쓴이 : 텃밭일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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