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스크랩] (생태계) 내일을 위해 명백히 정당한 행동

그린테트라 2011. 5. 1. 19:40

 

퉁가리와 자가사리는 전문가도 언뜻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긴 모습이 비슷한 우리나라의 담수어류다. 퉁가리는 금강 이북인 한강과 북한의 하천에, 자가사리는 금강부터 낙동강까지 서해안과 남해안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에 분포하니 전문가가 아니라면 생김새보다 잡히는 수계를 보고 구별하는 게 쉽다. 두 종과 아주 비슷한 종류로 퉁사리도 있다. 금강 중류인 웅천천과 영산강 일부에 분포하는데, 퉁가리와 자가사리보다 몸이 둥글다고 전문가들이 주장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그 3종류의 생태 습성은 거의 같다. 자갈과 모래가 깔린 하천 중상류 바닥에 살며 낮에는 돌 아래 숨어있다 야간에 나와 수서곤충을 잡아먹는다.

 

퉁가리와 퉁사리, 그리고 자가사리는 사촌인 메기처럼 살코기가 부드럽고 맛 또한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기름이 자르르한 매운탕은 먹는 이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한다. 단점이 있다면 메기와 달리 덩치가 작다는 거다. 여러 마리를 넣어야 국물이 진해지니 천렵 나온 사람들은 발목까지 빠지는 강가에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 돌들을 뒤적여야 하는데, 바로 그때 사단이 날 수 있다. 돌을 뒤집자마자 달아나는 녀석을 잽싸게 잡아도 피부가 부드러우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터. 그래서 손바닥으로 꽉 쥔다면? 그 사람은 톱니 같은 지느러미 가시에 푹 찔려 발을 동동 굴리며 한참을 고통스러워할 게 틀림없다.

 

평소에는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 맨 앞의 피부에 부드럽게 묻혀 있지만 위협을 느끼면 곧추세우는 가시는 얼마나 단단한지 가죽 장갑을 겹쳐 껴도 소용이 없는데, 조금이라도 찔리면 참을 수 없는 통증을 일으킨다는 거다. 아무래도 어떤 물질이 분비되는 듯한데, 찔렸던 경험이 학습된 천적들은 녀석을 다신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퉁가리 종류는 돌을 들추는 사람의 눈에 띄어도 그리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그저 그 옆의 돌 아래로 숨을 정도. 큰물이 휘감아들며 자갈과 모래를 가장자리에 내려놓곤 하는 하천이 있는 한, 우리 하천에서 퉁가리 종류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요령 있게 잡으면 천렵 나온 보람도 만끽할 수 있으리라.

 

독특하지 않은 하천이 지구촌에 있을 리 없겠지만 우리 하천도 특별하다. 좁은 국토의 등뼈에서 발원하는 하천마다 색다른 담수어류상을 가지지 않던가. 미꾸라지처럼 생겼지만 바닥에 모래가 깔린 맑은 하천에 주로 분포하는 기름종개 종류를 살펴보자. 기름종개와 수수미꾸리는 낙동강 수계로 만족하는데 줄종개는 낙동강과 섬진강 수계를 차지한다. 점줄종개는 서해안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에 고루 분포하지만 참종개는 금강과 한강 수계를 떠나지 않고 왕종개는 영산강에서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에 두루 살고 있다. 반면 북방종개는 백두대간에서 발원해 강릉 이북의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작은 하천에 제한되는데 부안종개는 오로지 변산반도를 적시는 백천만 집착한다.

 

기름종개 종류만 지리적 다양성을 갖는 건 아니다. 금강모치와 대농갱이와 어름치와 꾸구리 들은 한강과 금강에 분포하고 낙동강만 고집하거나 남쪽으로 나가는 하천 이외의 서식을 거부하는 종류도 많다. 학자들은 다양한 원인을 유추한다. 큰물이 들어 큰 강의 상류 분수계가 먼 옛날 붕괴돼 수계가 잠시 만난 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첫째라면, 우리나라의 하천들은 기원이 다르다는 설이 둘째다. 오래 전에 같은 종이었지만 사는 곳이 달라지면서 다른 종으로 갈라졌거나 원래 다른 종이었다는 건데, 빙하 시대 전후의 아주 먼 옛날, 서해안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은 황하강의 상류, 남해안으로 나가는 하천은 양자강의 상류였다니 그럴 만하다. 동해안으로 나가는 작은 하천은 백두대간에서 바로 거대한 호수였던 동해로 흘러갔다고 한다. 비록 면적이 좁아도 그렇듯 기원이 다양하니 하천마다 담수어류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지구촌의 모든 하천은 굽이쳐 흐른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운 상태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하천도 굽이치지만 산지가 많은 만큼 유속이 빠르다. 게다가 비가 장마철 전후의 여름에 집중되니 계절과 지역에 따라 강은 수량과 유속의 변화를 심하게 겪을 수밖에 없다. 국토의 65퍼센트인 산을 적신 빗물은 계곡의 집체만한 바위들을 휘돌며 내려가다 중상류에 호박만한 돌을 내려놓고, 더 흘러가며 자갈과 모래와 고운 흙을 영겁의 세월 동안 차례로 내려놓았다. 그래서 강폭이 넓어지는 가장자리는 어김없이 백사장이 펼쳐지고 하구에는 갯벌이 형성되었다. 물을 정화하는 백사장과 갯벌은 예나 지금이나 강과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의 산란장이다.

 

빙하가 뒤덮지 않았던 우리의 산하는 고생대지층을 간직한다. 높이가 수 킬로미터에 달했던 빙하가 녹으며 땅을 평편하게 깎아내린 유럽과 달리 장엄하거나 아기자기한 생태공간을 여태 보존하는 우리나라는 다양한 식물이 뿌리내리고, 그 흔적이 쌓인 부식토가 산지에 푹신하게 스펀지처럼 남아 여름철에 집중된 빗물을 봄철 갈수기까지 조금씩 흘려보낸다. 덕분에 우리 조상은 강가와 갯가에 마을을 정해 고기 잡고 농사지으며 모자람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강과 바다의 다양한 물고기가 단백질을 한없이 제공하고 고생대의 유기물이 내려앉은 기름진 평야는 풍성한 소출을 약속해준다. 한반도에 첫 조상이 뿌리내린 이래 이제까지, 일제 강점기에 양식을 빼앗기기 전까지. 인구에 비해 경작지가 좁은 국토에서 지구촌 타 지역과 달리 굶주림을 모르고 살 수 있었다.

 

구천동 계곡이 있는 무주는 해마다 6월이면 ‘반딧불축제’를 개최한다. 올해 14회를 맞는다. 덕유산국립공원을 적시는 계곡은 구천 번 구부러지는 차고 깨끗한 물줄기를 자랑하는 만큼 반딧불이도 많았다. 그 명성이 남아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정작 반딧불이와 직접 관계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축제 기간에 이따금 선보이는 반딧불이는 사실 구천동 계곡이 고향은 아니다. 축제를 위해 다른 지역에서 도입했다. 계곡을 더럽히는 무지개송어 양식장이 국립공원 안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기 시작한 반딧불이는 골프장과 스키장이 산비탈을 허물고 들어서면서 일제히 떠났기 때문이었다.

 

산림이 울창하고 부식토가 푹신한 산간지방에 큰비가 내리면 순식간 계곡은 포말을 일으키며 으르렁대지만 비가 그치자마자 잦아드는 강물 그 자체는 깨끗하다. 지리산 뱀사골이 그렇다. 하지만 산허리에 골프장과 스키장, 그리고 관련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난잡한 지역은 다르다.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멀칭 없이 재배가 불가능한 고랭지 채소밭이 산등성을 차지하면 시뻘건 흙탕이 찢어진 비닐들과 더불어 계곡에 소용돌이친다. 산록을 이리저리 끊는 임도가 가설될 때 비가 내리면 흙탕이 유입되는 작은 계곡도 교란된 생태계가 한동안 회복되지 않는데, 대단위 리조트단지가 들어선다면 오죽하랴. 무주구천동의 반딧불이는 그때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은 자갈과 바위에 물이끼가 연초록으로 핀다. 주둥이가 배 쪽을 향하는 모래무지 종류들이 그 물이끼를 더러 뜯어먹지만 담수어류의 먹이가 되는 수서곤충들이 물이끼에 의존한다. 다슬기도 그 중의 하나다. 한데 흙탕이 들어와 자갈과 바위를 덮으면 맑은 물에 포함된 유기물질을 양분 삼는 물이끼는 탄소동화작용을 멈추며 그만 뿌리를 잃고 만다. 물이끼가 사라지면 먹이를 잃은 다슬기가 계곡을 떠날 수밖에 없고 다슬기를 먹고 자라는 반딧불이 애벌레도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른 여름부터 밤하늘을 수놓는 애반딧불이와 늦반딧불이는 무주구천동 계곡에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천에 흙탕이 유입되면 보는 이를 경탄하게 하는 물총새와 청호반새도 먹을 게 없어 정든 하천을 떠난다. 자갈 사이에 흙탕이 배어들면 퉁가리와 자가사리도, 메기와 기름종개도 어쩔 수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들을 잡아먹는 해오라기와 수달도 다른 곳으로 가버리고 말 것이다. 한반도에 강물이 흐르면서 깃들었을 숱한 동식물들이 오염된 서식공간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생명을 잃고 말리라. 그나마 깨끗한 물이 흙탕을 조금씩 씻어내는 강이라면 참을만하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회복된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댐이나 보에 막혀 흐름을 잃을 경우 강의 생태계는 치명적으로 돌변한다. 그 자리에 외래종이 들어오면 뒤죽박죽된 생태계는 복원되지 못할 것이다. ‘4대강 사업’ 이후가 그래서 걱정일 수밖에 없다.

 

낚시꾼들의 손맛을 위해 북미에서 우리 호수로 도입한 배스와 블루길은 굽이치며 빠르게 흐르는 우리 하천에 적응하지 못한다. 봄철에 갈수기를 맞았다 여름철 범람하는 강물에 알 낳을 곳 찾지 못할 것이고, 낳는다 해도 하류로 휩쓸려 내려가거나 우리의 물고기들이 먹어치울 가능성이 높다. 흙탕이 들어와 고이는 호수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알은 눈에 잘 띄지 않을 테고, 저보다 작은 물고기들을 마구 먹어치우는 배스와 블루길이 좋아하는 환경이 아닌가. 흙탕이 끼어 숨을 바위나 자갈을 잃은 고유의 물고기들은 속수무책일 것이다. 호수 가장자리가 깊지 않다면 백로와 왜가리 같은 섭금류가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지만 효과는 크지 않으니 다채롭던 우리 하천의 생태계는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고생대의 유기물까지 포함하는 고은 흙을 바다로 연실 내려보내는 하구, 그리고 그 하구와 이어지는 우리 서해안의 갯벌은 생명의 보고다. 간만의 차가 유난히 큰 조수가 하루에 두 차례 밀고 드는 하구는 봄이면 뱀장어와 황어가 올라오고 가을이면 연어가 알을 낳으러 지나가는 통로에서 그치지 않는다. 복어와 조기를 비롯한 수많은 해산어류들의 산란장이다. 갯벌은 살아 있는 유기물 덩어리다. 게, 조개, 갯지렁이 뿐 아니라 숭어도 햇살 비출 때 피어오르는 갯벌 표면의 식물성플랑크톤을 훑어먹으며 살을 찌운다. 덕분에 갯벌을 가로막는 정치망은 오랜 세월 우리 식단을 풍요롭게 이끌어주었다.

 

우리나라의 드넓은 갯벌은 거대한 스펀지다. 표면을 뒤덮은 수많은 게, 그 아래의 조개들, 고동과 갯지렁이 들이 얽히고설키게 뚫어놓은 무수한 구멍들은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을 완충할 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막는다. 이산화탄소를 탄산칼슘 껍질로 고정하는 조개뿐이 아니다. 탄산칼슘 외골격을 갖는 규조류가 풍부하고 육지의 여느 습지보다 무궁무진한 식물성플랑크톤이 막대하게 탄소동화작용을 하지 않던가. 환경단체는 유기물을 분해하고 산소를 생산하며 어패류에 산란장을 제공하는 갯벌을 대자연의 콩팥이요 허파고 자궁이라고 말한다. 조간대의 갯벌은 온난화된 이후 높아진 해수면이 일으킬 너울성 파도도 어느 정도 완충할 것이다. 갯벌이 내내 보전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짱뚱어가 갯벌 위에서 뛰는 모습은 일본에서 더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데, 우리나라는 순천만 일원으로 협착되었다. 미역국에 하나면 넣어도 바다의 풍미를 물씬 선사하는 백합도 자취를 감춰가려 한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일원의 갯벌이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른의 두 손바닥을 합친 것만큼 패각이 커다랗던 1960년대 이전의 농합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무거운 껍질을 제거한 서너 마리만 짊어져도 어깨를 축 늘어지게 했다는 농합은 갯벌을 매립하지마자 사라졌다고 한다. 이제 차례상에서 절 받는 조기는 먼 바다에서 잡아와야 한다. 산란장을 잃은 조기들이 더는 우리 연안으로 다가오지 않는 대신 해파리들이 전에 없이 늘었다. 바다가 따뜻해진 탓도 있지만 해파리의 유생을 잡아먹던 생물들이 갯벌과 함께 드물어진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매립하며 쌓은 콘크리트 제방은 유생이 정착할 장소까지 제공하니 해파리는 더욱 극성스러울 수밖에 없다.

 

갯벌을 매립하면 철새는 깃들 곳을 찾지 못한다. 갯벌에 밀고 나는 바닷물을 바삐 따라다니며 부리의 생김새와 다리의 길이에 따라 먹이를 다채롭게 챙기며 목적지로 떠나기 전에 몸무게를 충분히 불리던 도요새와 물떼새들은 최근 들어 내릴 곳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마도요가 도착하지 않는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인은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마도요를 보아야 농부는 쟁기를 들고 화가는 화구를 챙기며 시인은 봄을 읊었건만, 한국의 중간 경유지를 잃은 마도요가 좀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겨울철 우리나라를 찾는 오리 종류는 얼마 남지 않는 갯벌과 인근 호수에 지나치게 밀집해 내려앉아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 조류독감이 흔해진 이유는 갯벌 매립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안전반경 이내라는 이유로 멀쩡해도 살처분되는 이웃 축사의 닭과 메추리와 오리는 얼마나 억울할까. 사람의 탐욕이 부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맞춘 농산물의 씨앗은 유전자가 아주 단순해 환경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녹색혁명의 부작용이다. 소기의 목표를 채우려면 농부는 종자회사가 권장하는 농사법에 복종해야지 마을 어른의 경륜은 참고할 필요가 없다. 농산물만이 아니다. 녹색혁명으로 과잉 생산한 곡물을 사료로 먹는 닭과 오리도, 소와 돼지도 마찬가지다. 조류독감과 구제역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가축을 사육하려면 엄격한 시설을 갖춰야하니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천수답을 몰아낸 녹색혁명이 일으킨 현상의 연장선이다.

 

왕잠자리와 방아깨비, 버들붕어와 각시붕어, 가물치와 드렁허리, 붕어와 참붕어, 참개구리와 금개구리, 누룩뱀과 유혈목이, 때까치와 파랑새, 족제비와 삵을 불러들였던 농경사회의 오랜 생태계, 다시 말해 논두렁 밭두렁과 물웅덩이는 요즘 없다. 관개농업을 전제로 하는 녹색혁명은 천수답의 물웅덩이를 일제히 매립했다. 수많은 생물들의 터전이었던 물웅덩이가 적시 적량의 물을 댐이나 보에서 공급하는 관개농업에 권리를 내주고 사라진 것이다. 이후 농촌과 농부는 농약에 절었고, 소비자는 그만큼 불안해졌다.

 

과수원에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으면 잡초는 그리 성가신 존재가 아니다. 잡초를 놔두면 벌레도 많을 터. 먹을 게 많은 까치는 덜 익어 떫은 사과와 배를 여름내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각종 농약으로 과수 이외의 생태를 몰아낸 과수원에 그물을 뚫고 까치가 침범하는 건 과일 말고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과수 스스로 풍상을 이기도록 자연스럽게 관리한다면 과수원은 까치로 인한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고 유기농을 고집한 농부는 증언한다(《기적의 사과》, 김영사, 2009). 소출은 적더러도 수입은 대체로 만족스럽다. 농약과 비료 값, 그물망과 그물망 수리비가 필요 없으므로.

 

농약 맞고 비틀거리는 곤충을 먹은 닭이 고꾸라지자 아까워 삶아먹은 농부가 병원에 실려가는 일은 부메랑 같은 현실이다. 말라리아를 줄이려 디디티를 움막에 뿌리자 지붕이 무너진 인도네시아의 사례도 부메랑이다. 디디티로 모기는 죽었지만 바퀴는 남았다. 비실거리는 바퀴를 먹고 굼떠진 도마뱀을 포식한 고양이가 죽었고 고양이가 죽자 쥐가 들끓어 페스트가 마을에 창궐한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디디티를 이긴 나방 유충이 도마뱀 없는 움막에서 서까래를 갉아먹자 그만 지붕이 무너져버렸다는 이야기, 디디티가 퇴출된 요즘 반복되지 않을까. 지금 그 변주는 훨씬 심각해졌다. 아토피와 환경호르몬, 구제역과 조류독감, 소아 성인병과 암,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의 뿌리는 같다. 탐욕이 부른 부메랑이다.

 

자연에서 태어난 사람도 전적으로 생태계에 기대며 산다. 생태계가 건강하지 못하면 과학기술을 앞세우는 사람도 얼마 견딜 수 없다. 꿀벌이 사라져가는 이유는 사람의 탐욕과 무관하지 않다. 벌꿀을 독차지하고자 꿀벌의 유전자를 단순하게 만든 게 원인이었다. 꿀벌이 사라지면 사람은 4년을 견딜 수 없다고 아인슈타인이 계산했다던데, 농작물과 가축의 유전자를 획일화시킨 사람은 자기 자식의 꿈마저 획일화시키려 든다. 학교는 국영수와 사탐 과탐 이외는 학력이 아니란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므로. 지구온난화는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생명에게 내일을 보장하지 않을 텐데, 탐욕을 위한 개발은 지구촌 곳곳에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린하고 있다.

 

여울과 소, 범람원과 백사장은 강의 탄력과 다채로운 생태계를 반영한다. 주기적인 홍수와 가뭄은 강의 생명현상이다. 강에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을 돋아올려 흐름을 차단하고 백사장을 퍼내며 범람원에 제방을 쌓는 ‘4대강 사업’은 강의 건강을 크게 해칠 게 틀림없다. 누군가 사람의 탐욕에 의해 강은 소리를 잃었다고 했다. 레이첼 카슨의 경고를 귀담아들은 미국은 새소리와 더불어 봄이 온다고 미국은 언론은 제 선조의 지혜를 기렸는데, 봄이 와도 새와 개구리가 울지 않는 우리 농촌에 아기 울음도 그쳤다. 도시의 아기도 산후조리원에서 갇혀서 울 따름이다. 자연이 침묵하자 사람의 내일마저 소리를 잃은 것일까. 이제 우린 어떤 선택과 행동에 나서야 할까.

 

전주천의 덕진보를 철거하자 잉어가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파주의 곡릉천과 울산의 태화강이 살아난 이유도 그렇다. 남동산업단지 유수지에 저어새가 둥지를 치자 보호운동에 나선 시민들은 공원에 홍여새와 후투티가 날아오자 크게 반긴다. 자연의 이웃이 돌아오는 공간에 둘러싸이면 사람은 편안해진다. 비로소 이웃을 돌아보게 되니 익명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줄어든다. 탐욕이 빚은 획일적 개발로 다양성을 잃은 회색공간에 자연스러움을 회복시켜야 한다. 온난화되는 지구에서 생물종 다양성을 잃은 생태계는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고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생물종은 생존을 담보하지 못한다. 자연의 산물인 사람도 생태계에 뿌리가 닿아 있어야 건강하다.

 

행동이 필요하다. 유전적 다양성을 가진 생물종 다양성 회복은 사람의 내일을 담보하므로 4대강 사업을 저지하는 데에서 벗어나 기본 보와 댐을 철거해 홍수와 가뭄을 복원하고 갯벌 매립을 막는 행동을 비롯해 새만금의 제방을 열어 바닷물을 드나들게 하는 일련의 행동, 농약과 화학비료를 피하며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폐기하는 행동, 사고의 다양성을 위해 대학입시와 대기업 취업을 위한 교육을 기피하는 행동들은 생존을 위해 명명백백하게 정당하다.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한 제안과 전망>, 2010 한국환경보고서, 녹색연합)

출처 : 내일을 생각하는 환경이야기
글쓴이 : 디딤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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