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가 아니라 식.의.주행
요리 마술사 요리 천국
우리는 중국 요리하면 기름진 맛과 화려한 모양을 우선 떠올린다. 그러나 실상 그렇게 맛있고 별난 중국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보고자 한다면, 우선 요리 기구에 주목해야 한다. 중국 가정집 주방에도 있는 흔한 기구로,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요리 도구로 마샤오(馬勺)라는 제법 커다란 요리 주걱이 있다. 마샤오의 특징은 열을 골고루 받고 향기가 바깥으로 새나가지 않으며 기름도 다른 곳으로 튀지 않도록 하는 그 구조에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요리 도구는 찜 가마와 식칼이다. 중국 주방장은 묵직하고 널찍한 채도를 많이 쓴다. 이에 덧붙여 대나무 젓가락 또한 필수품이다. 연한 채소를 찢거나 달걀을 깨고 요리를 접시 위에 환상적으로 배치할 때 쓴다.
중국 요리를 맛있게 먹으려면 조미료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일례로 짠 맛을 돋궈주는 간장만 하더라도 중국 요리에서는 다양한 종류를 가려 써야 한다. 생선 찍어먹는 간장, 또 야채, 육고기 등 재료에 따라 달라지고, 조리 방법에 따라 사용하는 간장이 달라야 제맛을 음미하게 된다.
毛澤東이 즐기던 토장국
저녁 식사는 湘菜 즉, 湖南省 요리 전문점에서 했다. 이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는 요리 중에 毛주석이 즐기던 고향 음식이 별미라고 했다. 우리식으로 하면 토장국 같은 찌개였는데 맛이 괜찮았다. 그리고 삼계탕 같은 것도 우리 입맛에 맞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맛있었던 것은 하얀 쌀밥이었다. 중국 음식점에서 내오는 공기밥은 대개 쌀도 안 좋은데다가 꼭 스팀으로 찐 것 같다. 윤기도 없고 찰기도 없는 밥이다. 심지어는 燕沙商場 지하에 있는 고급 한식당 <서라벌>도 공기밥은 별로다. 그런데 오늘 맛본 이 집의 공기밥은 맛이 달랐다. 쌀이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는 우리네 밥그릇만한 토기에 잘 인 쌀을 담아 따로 따로 밥을 지었기 때문인 듯하다. 돌솥밥보다 좋았다. 왜냐하면 토기를 지나치게 뜨겁게 열을 가하지 않아도 밥이 되기 때문에 바닥이 타지 않고 밥이 눌지 않기 때문이다. 또 개고기 냉채도 나왔는데 이것은 돼지머리 고기를 눌러서 파는 편육 같았다.
청대 궁중요리점 倣膳 飯庄
북경을 여행한 외국인 단체 관광객 가운데 北海公園 내에 있는 고급 궁중요리 음식점 "倣膳"을 들른 이는 별로 없다. 이 곳은 중국의 국빈도 자주 찾는 곳인데 닉슨이나 다나까 수상 등도 다녀갔다고 한다. 지금도 중국의 최고 지도자급 인사들이 연회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외국인 관광객들과 외국 바이어를 대접하고자 하는 중국 기업가들도 애용하는 장소 가운데 하나이다. 1989년에는 일본의 도쿄에 분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이 음식점은 궁중 요리를 전문인데, 7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11년, 辛亥革命이 일어나 淸왕조의 통치를 뒤엎고 마지막 황제인 浦儀를 황궁에서 축출하자, 원래 황실 주방이랄 수 있는 "御膳房"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1925년, 北海公園이 정식으로 개방되자 원래 "御膳房"에서 일하던 요리사 중의 한 사람이 그의 아들 등과 함께 이 공원 내의 북쪽 호반에 찻집을 열고는 그 이름을 "倣膳"이라 지었다. 아마도 "御膳房"을 흉내 내었다는 의미인 듯하다. 이 찻집은 단순히 茶만을 판 것이 아니라 茶와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궁중 간식거리와 일부 안주감을 내 놓았다. 예를 들면 "肉末燒餠", "豌豆黃", "小窩窩頭" 등을 만들어 판 것이다. 이 음식들은 많은 재료 연구와 세심한 주의가 깃들인 정교한 제작 방식으로 곧 유명해졌다.
倣膳은 1955년에 이르러 국가 시책인 "사회주의 개조"에 발맞춰 사영에서 국영으로 바뀌었다. 이 음식점은 풍경이 수려하고 내부가 전체적으로 용과 봉황 등의 길상 도안 및 궁정 장식으로 이루어져 매우 우아하고 격조가 있다. 1959년 규모를 확장하면서 예전의 유명 궁중 요리사들과 그 제자들을 대거 초빙했다. 이로써 조리 방식의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
"倣膳"에서 가장 궁중 요리다운 것은 "滿漢全席"이라는 풀코스 메뉴이다. 이것은 淸朝 乾隆帝 시기에 황제의 생일잔치나 국가적 축하 행사시 베풀어지는 연회 음식상을 재현한 것이다. 이 명칭은 康熙帝가 작명해 준 것이라고 한다. "滿漢全席"은 32가지의 진귀한 재료를 엄선해 쓰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즉, "禽八珍"(紅燕, 飛龍, 天鵝 등), "海八珍"(제비집, 大鳥參, 생선지느러미, 생선위장, 생선뼈, 고래고기 등), "山八珍"(낙타혹, 곰발바닥, 원숭이골, 고릴라입술, 표범태반, 사슴근육 등), "草八珍"(銀耳, 죽순 등). 조리 방법은 만주족의 불에 굽는 방식과 한족의 튀기기, 삶기, 볶기, 찌기, 고우기 등의 방식을 모두 사용하므로 가히 남북 요리의 정수라 할 만하다. 완벽한 "滿漢全席"은 134가지의 더운 요리와, 48가지의 차가운 요리 및 간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倣膳"에서는 "滿漢全席"코스 외에 그것을 약간 간소화시킨 "滿漢全席精選"을 메뉴로 내고 있다.
북경에 가면 <全聚德>에서 오리구이를 먹어 봐야죠
조금 늦게 도착한 취앤쥐드어는 자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진작에 도착한 일행이 받아 놓은 대기표 번호는 157번이었다. 평소에도 붐비는 곳이긴 했지만 오늘은 연휴를 맞아 가족 단위로 외식을 나온 사람이 많아 대기자가 더욱 많은 듯 했다.
가까스로 자리를 배정 받은 후 우리는 카오야 두 마리와 두 접시의 야채 요리를 시켰다. 나는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이 음식점과 카오야 요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를 학생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베이징 카오야>
털 뽑히고 내장을 발라낸 후, 오리의 항문을 막은 후 주둥이를 통해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는 다시 봉합하여 찬바람에 말려 둡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그 상태에서 주방으로 들여와 기름을 바르는 등 가공을 끝낸 상태의 북경 오리구이용 오리들 입니다. 오리는 "없으면 훔쳐 먹으라"는 고깁니다. 그 약효에 비하면 우리네 식탁에 오른 지는 별로 오래되지 않은 셈이지요. 사진 오른쪽은 오리를 화덕에 넣어 굽고 있는 모습이네요. 그림이 보여주듯이, 화염에 오리 몸통이 직접 닿으면서 기름기가 쫙 빠지고,
이화나무의 향긋한 내음이 오리 몸통에 배어들게 되겠네요.
북경에 와서 카오야를 먹어보지 않으면 북경에 온 보람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할 정도로 이 요리는 북경 정통 요리가 되었다. 이 요리는 원래 남방 요리였다. 明朝 永樂年간에 明 成祖가 수도를 南京에서 북경으로 옮기면서 여러 종류의 장인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중에 유명한 오리구이 요리사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오리구이의 정종은 그래도 북경이라는 말을 한다. 왜냐하면 조리 방법도 변화를 가져왔지만 재료로서의 오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리가 달라진 데는 다음과 같은 곡절이 있다.
明淸 양대에 걸쳐 남방에서 북방으로 식량을 운반하는 데는 宋대에 완비된 운하가 이용되었다. 그래서 북경 근처 운하 연변의 오리들은 운하에 흩뿌려진 양곡을 오랜 기간 먹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오리의 체형과 육질이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개발된 오리 사육방법도 마찬가지 효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오리가 일정정도 크면 원하는 체형이 나올 수 있도록 사료를 조절해 먹이는 한편 오리의 활동량을 줄이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明朝에 쓰여진 유명요리부에 오리구이는 북경이 本地인 것으로 오르게 되었다.
오리구이로 가장 유명한 음식점이 바로 <취앤 쥐 드어(全聚德)>이다. 이 음식점은 치앤먼(前門) 근처에도 있고 흐어핑먼(和平門) 근처에도 있다. 외국인들은 어느 것이 정종인지 잘 모른다. 사료에 의하면, <취앤 쥐 드어>는 淸 同治 3년(1864년)에 세워졌다. 점주는 楊全仁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치앤먼 바깥쪽에 육고기 시장로가 있었는데 그 동쪽에 <德聚全>이라고 하는 과일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는 장사가 잘 되지 않은 모양이다. 이 가게를 楊씨가 사서는 가게 이름을 뒤집어 지금의 <全聚德>간판을 내걸고 오리구이 장사를 시작했다. 130여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 가게는 갈수록 커져 이제는 "그룹"이 되었다. 국내 유명 도시에 분점이 60개나 생겼고, 해외에도 분점이 생길 정도가 된 것이다.
초기에도 그랬지만 이 집의 전통은 1990년대 초 가게를 새로 단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오리를 구워서 손님들이 사가도록 파는 것이었지 앉아서 먹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저우 언 라이(周恩來) 총리가 1970년대에 흐어핑먼 근처에 <全聚德>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오리구이 식당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내 생각으로는 周총리도 오리구이를 즐겼겠지만 외국 손님들에게 이 요리를 북경 특별 요리로 대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치앤먼에 있는 가게는 말 그대로 가게이지 식당이 아니었으므로 중난하이(中南海)에 조금 더 가까운 흐어핑먼 근처에 고급 식당을 만들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말이 고급 식당이지 실제로는 아주 평범한 식당이었다. 내가 1990년에 오리구이를 먹은 집이 바로 흐어핑먼에 있는 취앤 쥐 드어 였는데 벽에 외국 귀빈들과 중국 지도자들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어서 유명한 집으로 생각할 수 있었지 시설은 형편없었던 것이다. 지금 기억으로 미국 대통령(닉슨 아니면 레이건인 듯 하다)도 그 식당에서 오리구이를 먹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새로 단장을 해서 아주 고급스럽다. 따라서 취앤쥐드어의 원조는 치앤먼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취앤쥐드어 라는 가게 이름의 뜻을 두고도 말들이 많다. 나도 한번 뜻풀이를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다들 모였으니 덕스럽다" 뭐 이정도로 해석했던 것 같다. 앞에서 보았듯이 원래 있던 간판을 뒤집어 단 셈이니 점주가 무슨 큰 의미를 갖고 작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명칭에 대해서는 周총리가 설명한 바 있는데, 그 해석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날 외국 귀빈을 취앤쥐드어에 초대해서 대접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周총리에게 식당 이름이 무슨 뜻인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박식하다고 소문난 周총리는 이렇게 뜻풀이를 했다. "全而無缺, 聚而不散, 仁德至上" 즉,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고, 다들 모여 흩어짐이 없으며, 어질고 덕스러움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라는 뜻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이 해석은 아직까지도 권위를 갖고 있다.
취앤쥐드어가 자랑하는 오리 굽는 방식은 "明火" 에 오리를 매달아 굽는 것이다. 즉 장작의 화염이 직접 오리에 닿는 걱이 특징이다. 대추나무, 배나무 등 과일나무들을 연료로 삼기 때문에 화로에서 갓 나온 군 오리에는 독특한 맛과 향기가 묻어난다. 오리를 굽는 데는 다음과 같은 절차가 필요하다. 먼저 숨을 끊고 나서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털을 뽑는다. 이후 뱃속에 바람을 불어 넣어 부풀렸다가 내장을 모두 긁어낸다. 모양을 잘 잡은 후, 속을 씻어 낸다. 고리에 걸어 서늘한 곳에서 거죽을 말린다. 다시 거죽을 뜨겁게 한 후, 설탕을 묻히고, 다시 서늘한 곳에서 거죽을 말린다. 그러고 나서 오리를 밀봉시키면서 물을 붓는다. 이제 화로에 넣은 후 잘 그슬리도록 몸통을 돌리면서 잘 굽는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면 화로에서 꺼낸다.
오리 구이를 먹는 데는 荷葉餠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만두피, 가늘게 썬 새콤한 오이조각, 길게 썬 파, 달착지근한 춘장(甛麵醬) 등이 필요하다. 만두피에 오리를 한첨 올려놓고는 파와 오이 그리고 춘장을 곁들여 쌈싸듯이 해서 먹는 것이다. 식탁에 오리구이를 올릴 때는 한 조각의 오리 혓바닥과 두 조각의 오리 등심을 갖춰 내놓는데, 이는 가장 존귀한 손님을 위해 준비해 두는 것이라고 한다. 나도 어떤 때는 오리 머리를 단면으로 잘라 뇌와 혀를 접시에 담아온 경우를 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그렇게 별미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나중에 나오는 탕이 더 감칠맛 난다고 느낀다.
그런데 오리구이를 <全聚德>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보다도 더 오래된 오리구이 집이 있다. 그것은 치앤먼 똥따지에 에서 동쪽으로 크게 한 블럭 더가면 나오는 충원먼(崇文門) 거리에 있는 <便宜坊오리구이점>이다. 그러나 간판에 값싸다라는 의미의 "便宜" 가 써 있다고 해서 이 집을 싸구려 음식점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집의 이름이 붙여진 내력에 따르면, 明代의 충신 楊繼盛이 이 집 이름을 붙여주고 현판을 써줄 때 "편리하고, 마음껏, 적합하게"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외에 이 집이 처음 생겼을 때 간판도 없던 시절에 인근 사람들이 싸다고 느껴 "피앤이 ᄑ항"이라고 구전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집이 지금 싸구려 음식점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집이 취앤쥐드어와 다른 오리구이 맛을 내는 데는 굽는 조리 방식이 다른 데 비결이 있다. 즉, 이 집은 요리를 구울 때 화염이 직접 오리에 닿게 하지 않는 방식을 쓴다. 이러한 화로를 중국어로 "먼루(燜爐)"라고 하는데, 이 화로 안에 오리를 넣고는 화로 밖에서 불을 지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오리가 화로 안에서 열을 골고루 받았기 때문에 익힌 정도가 거의 균일한데다, 불꽃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기름과 수분이 덜 없어진 상태가 된다. 따라서 오리가 다 구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껍데기와 살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게 된다. 또한 색깔도 붉은 빛이 돌고 윤이 난다. 이 점이 취앤쥐드어의 구이 방식과 현저히 다른 점이다. 즉, 취앤쥐드어의 오리구이는 거의 껍질만 먹는다. 요리사가 오리를 가져와서는 능숙한 칼솜씨로 껍질과 살의 경계선을 잘라내어 주로 껍질만 손님들이 먹게 한다. 우리 입맛에는 오히려 껍질만 먹는 것이 아니라, 즉 껍질과 살이 붙어 있어 자연스레 살도 먹게 되는 "먼루" 방식이 더 적합할 듯싶다. 이런 식으로 구우면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살은 연하여 한 입 베어 물면 기름이 베어나면서 입안에서 그대로 녹아버린다. 또한 화로에서 꺼낸 오리의 모습이 훨씬 풍만하고 살이 많이 나온다.
이 집은 이미 600여 년 전에 남방 사람이 북경에 와 쉬앤우먼(宣武門) 바깥의 쌀시장 골목에 닭고기와 오리고기를 파는 가게를 연데서 비롯되었다. 당시에는 오리와 닭을 잡아 주고 털을 벗겨주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먼루"방식으로 오리와 닭을 요리해 팔았다. 그러다가 이 집이 문을 닫게 되었는데, 후일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치앤먼의 생선시장 입구에 음식점을 내었다. 나중에 다시 이 사람들이 지금의 위치로 가게터를 옮긴 것이다. 지금 자리에 문을 연 것만 해도 1855년이니깐 취앤쥐드어 보다 9년가량 오래된 셈이다. 그러나 영업 실적은 취앤쥐어드어 보다 못해 4개의 분점 및 특허점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의 설명이 끝날 무렵에, 요리사 두 명이 각기 잘 구운 두 마리 오리를 갖고 나와 우리 앞에서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오리를 구기 전에 손님을 주방으로 불러 구울 요리 몸통에 꿀로 손님이 직접 원하는 문구를 적어 넣게 했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너무 많아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번거로워 없앴는지 그 절차를 생략했다.
요리사는 오리 껍데기와 진피층 사이를 절묘하게 잘라낸 후 다시 약간의 살점을 발라내 주었다. 껍데기 부분은 씹으면 바삭바삭 하면서 기름이 묻어났고, 살점은 오리 냄새도 나지 않고 부드러운 질감을 느끼게 한다. 다섯이서 두 마리를 먹다 보니 약간 남는 듯 했으나 마지막 한 점까지 알뜰하게 다 먹어치웠다. 껍데기 부분은 직접 춘장에 찍어 먹었고, 살점 부분은 엷게 썬 파를 춘장에 찍은 후 만두피 같은 곳에 오리 살점과 함께 싸서 먹었다. 쫄깃쫄깃 하면서도 담백하기까지 한 맛이 일품이었다. 마지막으로 탕으로 입가심을 하고 식당을 나섰다.
양고기 샤브샤브의 명가 <東來順>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수완양러우 요리점은 <東來順>이다. 이 집은 원래 王府井 東安시장 근처에 있었다. 나도 1993년엔가 한번 들러 음식 맛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내 느낌은 별로 익숙치 않은 요리였기에 맛에 대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웠지만 주오어 리아오(調料)의 다양함에 놀랐었다. 한 20 여 가지의 다른 맛을 내는 양념장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미 그 맛을 아는 사람들은 능숙하게 섞어 자신이 즐기는 양념장을 만들었으나, 나처럼 문외한인 경우는 조금 난감했다. 이 고색 창연한 식당이 재개발에 의해 지금은 東單거리로 이사해 신장 개업을 했다.
<東來順>은 1993년 봄에 약간 다른 업종으로 시작된 가게다. 당시 王府井가 東측에 새로 형성된 東安市場을 丁德山이라는 젊은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장사가 자본도 그다지 많이 들이지 않았으면서도 영업은 잘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자기도 이곳에서 음식 노점상을 벌리기로 작심했다. 즉 처음에는 평범한 음식 노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에게 빌린 리어카에 그릇, 긴 의자, 수저 등을 갖추고는 곧 콩즙과 손으로 두들겨 빚은 떡을 위주로 한 이슬람식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3년 후인 1906년에 그는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에 나무로 처마를 만드는 등 해서 간이 음식점을 만들고는 <東來順粥攤>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런데 1912년에 동안시장에 불이나 그의 초막 음식점도 불에 다 탔다. 그래서 그는 새로 3칸짜리 기와집을 짓고는 아예 <東來順羊肉館>으로 확장 개업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슬람 음식인 양고기를 전문으로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안먹는 대신에 양고기를 즐긴다.
그는 양고기를 취급하면서 "치앤 먼(前門)" 바깥쪽에 있는 <正陽褸>라는 음식점에서 일하고 있던 유명한 주방장을 스카웃해 왔다. 이 주방장의 칼로 음식 재료를 써는 솜씨가 남달랐기에 높은 보수로 초빙해 와 양고기를 아주 얇게 썰어내도록 한 것이다. 그가 썰어낸 양고기편을 청자 접시에 펼쳐 담으면 양고기편을 통해 바닥의 청자 무늬가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東來順>의 양고기는 칼솜씨에 있어서만 독특했던 것이 아니라 양고기를 골라오는 데 더욱 공을 들인 것이었다. 즉, 매년 가을이 되면 내몽고 集寧지구의 西塢旗에서 꼬리가 큰 면양을 대량 구입했다. 이 양들은 모두 거세되어 2,3년간 사육한 숫양이거나, 아니면 단 한 번만 새끼를 낳은 적이 있는 암양이어야 했다. 아울러 "똥 즈 먼(東直門)" 바깥의 수백 畝(666.7평방미터)의 토지를 매입해서 양을 사육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되면 이 요리가 제철을 맞이하는 셈인데, 양의 여러 부위 중 "上腦", "三岔", "黃瓜條" 등의 부위를 골라 요리 재료로 썼다. 왜냐하면 이 부위만이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신선하고 연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으로 인해 음식의 질량 면에서 다른 업소의 추종을 불허했고,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20년대가 되면, <東來順>은 이미 농 공 상 연합 기업으로 발전한다. 이 업소는 이미 수십 헥타아르의 토지를 차지해 양을 키우고, 필요한 곡식과 야채도 재배했다. 아울러 작업장을 만들어 소맥, 황두, 깐 밤, 깨 등을 가공해 밀가루, 장, 식초, 향유, 깨 소스, 여러 면발 등을 만들어 공급하였던 것이다. 또한 필요한 각종 조미료, 예를 들어 특별 제작한 단 맛이 나는 마늘이라든가, 부추도 자력으로 공급해고, 재료의 질적 수준을 높게 유지했다. 이 외에도 <東來順>은 대장간을 갖춰 놓고 사용하는 동철 화로 등을 모두 스스로 제작해 사용했다. 이쯤되었으니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농 공 상 연합 기업이라 할만했다.
신중국 건설 후에도 <東來順>은 원래의 맛과 특색 등을 유지했고, 경영과 서비스 면에서 부단히 개선을 거듭해 왔다. 가장 중요한 관건은 역시 고기 재료를 선별하는 데 있다. 그들은 중국 전역의 모든 양 산지에 대해 조사와 분석을 거듭한 끝에 내몽고의 集寧지구 錫林格勒盟에 있는 양 산지에서 사육하는 양 가운데 거세한, 꼬리가 짧은 양을 고기 재료로 선정했다. 양의 크기, 규격, 사육 기간, 도살 방법 등에 대해서도 모두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준수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양의 모든 부위를 조사한 결과 몇 군데 살이 아주 연한 부위만 골라서 쓰는데, 보통 양 한 마리를 잡으면 30%가량만 요리 재료로 쓴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이 쓰는 고기는 부드러울뿐만 아니라 대단히 정갈하다. 즉 껍질을 벗겨내고, 힘줄을 끊어내고, 뼈를 발라내어 진정한 살집만 골라 쓰는 것이다.
양고기를 얇게 써는 것은 모든 가공 과정중 관건이 된다. 예전에는 손으로 톱을 이용해 썰었기 때문에 공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소모되어 대량 공급이 불가능했다. 한번은 1973년에 아시아 아프리가 탁구 초청전이 북경에서 거행되자 1,400여명의 대표단을 위해 <東來順>이 음식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칼솜씨가 뛰어난 14명의 요리사가 3박4일간 동원되어 매일 썰어낸 양고기가 1,000여판 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미 <東來順>이 자체 개발한 기기를 이용해 고기를 썬다고 하는데, 한 대당 한 시간에 25킬로그램을 썰 수 있다고 한다. 썰어낸 고기가 마치 종잇장 같이 얇고, 선명한 색상이 비할 바 없어, 청화 접시에 펼쳐 내오면 목단처럼 선홍색을 드러낸다. 이러니 보는 눈도 즐겁고 뜨거운 신선로에 한 두번 휘저어 먹는 고기 맛도 일품일 수밖에 없다. 다른 집들은 얼린 양고기를 썰어 내오기 때문에 고기가 돌돌 말려나온다. 색상 또한 얼어있기 때문에 약간 흰빛을 띈다.
탕에서 건져낸 수완 양러우를 찍어먹는 "주오어 리아오" 즉, 소스입니다. 북경에 있는 200 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통 "똥라이순(東來順)"에는 이 소스가 10여 가지가 넘게 나와 손님의 취향에 따라 섞어 먹습니다만, 이 <불이아(弗二我)>에는 두 가지 소스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사진에서 보여주는 간장과 마늘 고추 등이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입맛에는 이 소스가 더 맞습니다만, 정통 맛을 보기 위해서는 "마지앙"소스 즉, 땅콩 소스에 찍어먹어야 합니다. 기실 이 소스는 회족들이 하는 음식점에서 숯불 소고기 구이를 먹을 때 찍어 먹으면 맛이 기막힙니다.
중국식 젓가락은 우리 것과 흡사합니다. 단 일반적으로 미끄러운 음식이 많은 탓에 재료로 나무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숟가락은 우리네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처럼 공통으로 먹는 찌개가 없고, 1인용으로 먹는 탕만 있는 탓인지, 숟가락의 길이가 아주 짧습니다. 대개는 사기로 만들지요.
마지앙(땅콩) 소스입니다. 토스트에 발라먹는 땅콩 잼을 연상하면 그 맛이 비슷할 것이고, 더 가깝게로는 더운 여름날 "중국집"에서 먹는 중국식 냉면에 뿌려먹는 땅콩 소스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마지앙 소스 위에 얹어 놓은 시앙차이라는 채소입니다. 그 말뜻은 향기로운 야채라는 뜻인데, 기실 우리가 맡기에 향기로운 냄새는 아닙니다. 콕 쏘는 향신료 느낌인데, 이건 남방 지역에서 입맛을 돋구로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많이 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함경도 지방 등지에서는 "고수"라는 이름으로 재배되며, 특히 절간 같은 곳에서 벌레가 끼는 것을 막기 위해 사용한답니다. 이 시앙차이의 용도는 우리식으로 치면 깻잎이라고 보면 됩니다. 보양식이나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상치 위에 깻잎을 얹어 먹으면 고기의 느끼한 맛이 덜해져 고기를 좀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지요. 이 시앙차이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고기에도 섞어 먹고, 심지어는 소고기 라면 위에도 얹어 먹습니다. 그러니깐 고기가 들어가는 곳에는 꼭 첨가된다고 보면 됩니다. 이 시앙차이를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중국통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에게는 친근한 음식인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비위 상하는 재료입니다.
나도 처음 중국 가서 식사를 할 때, 시앙차이와 얽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보이는 탕수육을 맛있게 먹는데, 옆의 일행이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안 먹냐고 물었더니, 그 탕수육 위에 있는 작고 푸른 풀을 가리키며, 저 것 때문에 못 먹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그 것만 따로 먹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호기롭게 탕수육에 붙어 있는 작은 조각을 떼 내어 씹었습니다. 아뿔싸, 그 맛이란 이제껏 먹도 보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더군요.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아주 맛있게 먹은 음식이었는데, 그 풀만 따로 먹으니 아주 희한한 맛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꼭 벌레를 씹은 듯한 맛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앙차이였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이 시앙차이를 따로 먹기보다는 고기 음식에 곁들여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따로 날로 씹어 먹어도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중앙의 <후오어 구오어>(火鍋)에 빨갛고 하얀 탕이 설설 끓어오르면 주위에 있는 야채와 두부 등을 넣어 익힙니다. 들어간 야채와 두부 등으로 인해 설설 끓던 탕이 온도가 조금 내려갈 겁니다. 잠시 후 다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탕의 표면에 물방울이 생기면서 터질 때쯤, 양고기 편을 탕에 넣어 몇 번 흔들어 먹으면 됩니다. 하나씩 고기 편을 넣어 흔들면 편 속에 있던 기름 부위가 먼저 녹아 고기가 조각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서 너 편씩 넣어서 잠시 후, 빨갛던 고기편이 색깔을 잃게 되면 꺼내 먹습니다. 이 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소승에 찍어 먹으면 되겠지요.
수완 양러우에는 고기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추운 초원 지방에서 시작된 수완 양러우(징기스칸 샤브샤브)에는 겨울에 북방 민족이 접하기 힘든 야채를 넣어 먹는 것이 매우 그럴싸한 음식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법이었겠지요. 실지로 몽골(중국어로는 외몽고라고 하지요)엘 가면 야채 먹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북경에서는 여러 가지 야채가 풍부하기에 수완 양러우에도 배추나 성차이 청경채 양배추 버섯 등 다양한 채소류가 가미되어 그 맛을 더해 줍니다.
중국에는 다양한 두부가 있습니다. 우리네 식탁에 오르는 두부는 기껏해야 보통 두부와 순두부 두 가지이지요? 그런데 혹자는 말하기를 중국의 두부는 200여 가지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콩으로 만들어야하는 근본 재료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양이나 질감에 따른 차이이지요. 예를 들면 고무줄처럼 가늘고 질긴 두부, 두께가 0.5밀리도 안되는 얇은 카드 같은 두부, 간장 등으로 만든 소스를 끼얹어 생맥주의 안주감으로 먹는 순두부, 지아창떠우푸(家常豆腐)라고 해서 늘상 집에서 먹는 두부 등. 그 모양이나 요리 용도에 따라 매우 다양한 두부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사진에 나오는 희고 구멍이 숭숭 뚫려 보이는, 그래서 마치 계란찜을 잘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두부인데, 이 두부는 얼렸던 것이라 해서, 똥떠우푸(凍豆腐)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끓는 탕속에 넣어 익혀 먹습니다. 두부 옆에는 노란 호박이 먹음직스럽게 보이네요. 어디 그뿐인가요? 무우와 감자, 배추도 있네요.
버섯도 세 가지나 올려놓았네요. 여러분은 버섯 맛을 아시나요? 난 어렸을 때 버섯의 맛을 별로 몰랐던 것 같습니다. 자연관찰도감에 나오는 독버섯을 연상해서인지 버섯 요리에는 젓가락을 잘 대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대학생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속리산 아랫자락이었어요. 친구 할머니에게서 저녁상을 받고는 깜짝 놀랐었죠. 반찬이 20여 가지가 넘게 나왔거든요. 반찬의 대부분은 나물 종류였는데, 그 가운데 버섯도 몇 종 나왔습니다. 그 때 어쩔 수없이 먹게 된 버섯 맛이 제 입맛을 바꿔 놓았지요. 아하, 버섯이란 것이 산에서 나는 소고기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영양가도 여느 육류 못지않은 것 같습니다.
드디어, 탕이 펄펄 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빨간 탕은 끓는 것이 확연한데, 하얀 탕 국물은 별로 덥혀진 것 같지가 않네요. 그 까닭은 빨간 탕에는 고추 성분이 들어갔기 때문에 쉬 끓어 오른 것 같습니다.
북경 자장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장면을 매우 좋아한다. 중국 음식의 대명사로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련한 향수들도 가지고 있다. 어렸을 때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경우 자장면은 왜 그렇게 맛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값도 아주 서민적으로 싼 셈이다. 이런 자장면을 중국에 와서는 정작 맛볼 수 없다는 얘기들을 한중 수교 초기에 중국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했었다. 나도 사실 북경에 처음 왔을 때 자장면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우연히 북경대 앞의 생맥주를 파는 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요량으로 메뉴를 보다가 자장면을 발견하고는 주문했다가 실망한 적도 있다. 그리고 학교 식당에서 어쩌다 나온 특별 메뉴로서의 자장면을 맛보고는 너무 짜서 다 먹지 못한 적도 있다. 그때 생각이란 자장면만큼은 우리나라 것이 훨씬 맛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단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자장면을 이렇게 짜게 내는 것을 보니 자장면은 북경요리구나 하는 것이었다.
나는 중국을 드나든 지 근 20여년이 되지만 한국식 자장면 같이 맛이 있는 자장면을 먹어보질 못했다. 정 자장면이 먹고 싶으면 북경 미술관 건너편에 있던 "이원"이라는 상호의, 한국에 살던 화교가 대륙에 와 개업한 식당에 가서 먹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라오 치 렌 자지앙미앤"이라는 간판을 발견했다. 이것은 청나라 시기 팔기병들이 먹던 자장면이라는 뜻이다. 아마 팔기병들이 전장에서 간편하게 먹는 음식으로 개발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장면을 주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받던 아가씨가 다른 것은 시키지 않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다른 것은 정말 필요 없냐고 되묻는다. 나는 자장면을 먹기 위해 이 집에 왔다고 대답했다. 옆을 보니 양고기 다리를 뜯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저것도 아주 맛이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오늘은 자장면만을 먹기로 했다. 저 양고기는 외몽골에서 먹던 것과 비슷한 맛을 낼 것 같아 군침이 돌았으나 참았다. 오로지 자장면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잠시 후 자장면을 내왔다. 큰 쟁반의 중앙에 자장면의 면발만 채운 큰 접시가 하나 있었고 그 주위를 한정식의 구절판처럼 9개의 작은 접시들이 둘러 싸고 있었다. 그 작은 접시들에는 온갖 야채들이 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파, 숙주나물, 강화 순무처럼 겉이 남보라 빛인 무, 홍당무, 치커리, 삶은 콩 등 야채가 8가지였고 나머지 하나는 장이었다.
종업원이 친절하게도 내 앞에서 그 여덟 가지 야채를 차례로 면발위에 부어 주었다. 장만은 놔두고 가길래 내가 들이 붓고 섞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장의 분량은 우리식대로라면 터무니없이 적은 량이었다. 그것은 반찬으로 내놓는 춘장 수준이었다. 잘 휘저은 후 뜬 첫 젓가락 맛은 별로였다. 그것은 장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면발도 수타이긴 한 것 같은데 우리처럼 강력분이 아닌지라 쫄깃함이 덜했다. 그러나 젓가락질을 할수록 맛이 좋아졌다. 그것은 장이 더 잘 섞이면서 제 맛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색깔만을 고려해 장을 더 달랬으면 아마 짜서 못 먹을 터였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자장면 한 그릇을 해치우고 계산서를 받아보니 8위앤이었다. 주인에게 돈을 건네며 몇 마디 물어 보았다. 주인 말로는 자기네 집 자장면은 청나라때 팔기병들이 먹던 것이라는 자랑이 뒤따랐다.
원래 북경에서 자장면을 먹으려면 내가 가던 집이 한 곳 있긴 했다. 그 집은 한국에서 중국집을 경영하다가 건너온 화교가 하는 중국집인지라 맛이 서울 자장면과 같았다. 북경 미술관 앞에 있다가 지난 여름에 어언학원 근처 우다오커우에 있는 시지아오빈관 건너편으로 이사와 개업하고 있다. 그 집 자장면 맛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니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종류가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찾기로 하고 식당문을 나섰다. 아까 들어갈 때,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라이 크어 이 웨이"를 외치던 남자 종업원이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 내부 장식이라든가 식탁도 전통 냄새가 풍기는 빠시앤주오어 였는데 종업원들의 접객 방식도 아주 전통스러웠다.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띵찬 띠앤화 하오마 62566877를 적었다. 이런 음식점이 天壇 공원 앞에도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자장면 집은 "六必居"라는 곳이다. 이 집은 명나라 때인 1530년에 처음 세워진 것이라고 하니 이미 46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집은 원래 前門 식량 상점 거리 3호에 있었다. 몇 차례의 수리를 거친 후 현재까지도 고색창연한 기풍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가게의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는, 재료를 선택하여 사용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상등품을 써야 하며, 재료를 넣어 음식을 만들 때는 반드시 여실해야 하며, 제작 과정이 반드시 청결해야 하며, 조리 시간을 반드시 적당히 하도록 하고, 설비도 우수해야 하고, 조리에 사용하는 물도 당연히 순수하고 향기로워야 한다.
醬菜란?
위에서 말한 자장면에 부어먹는 재료인 醬菜로 유명한 북경내의 식품점은 "六必居"라고 하는 곳이다. 이 醬菜 전문점은 46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明朝嘉靖帝 9年(서기 1530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집은 치앤 먼(前門) 식량 상가에 있는데 1994년에 개축을 했다. 사료에 따르면 六必居 직판소매점(門市部) 홀에 걸려있는 "六必居"라는 현판은 明의 재상이 쓴 것인데,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용하는 음식 재료는 반드시 최상품이어야 하며, 재료를 쓸 때는 아끼지 말고 정확한 양을 다 쓰도록 하고, 제작 과정은 항상 청결을 유지해야 하며, 화력은 반드시 적합하도록 해야 하고, 설비도 반드시 우량해야 하며, 샘물은 반드시 잡티가 없는 맑고 깨끗한 물이어야 한다.
북경 醬菜는 생산 방식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 즉 老醬園, 京醬園, 南醬園의 셋으로 나뉜다. "老醬園"은 保定 지방의 제작 방식에 따른 것으로, 맛이 비교적 짜고, 醬의 향기가 진한 것이 특징인데, "六必居"의 제품이 이를 대표한다. 이 老醬園은 그 생산 기법이 정교하고 품질이 우수하며, 색과 향이 아름다워 수백년간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이곳의 전통 제품은 12가지인데, 甛醬黑菜, 甛醬八寶菜, 甛醬黃瓜, 甛醬甛露, 甛醬姜芽, 甛醬什香菜, 甛醬小醬夢卜, 甛醬瓜, 白糖蒜, 稀黃醬, 鋪淋醬油 등이다. 이는 당시 궁정에 납품하던 어전용 제품이었다. "京醬園"은 북경 醬類업계의 전통을 계승한 것인데, 이 때문에 "京作"이라고도 불린다. 그 醬菜의 맛은 달고 담백한데 "天源醬園"이 대표격이다. 天源醬園은 淸 同治帝 8년(서기 1869년)에 개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南醬園"은 남방의 풍미를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맛이 더욱 달고 가격이 적당하여 판로가 넓다. "桂馨齋醬園"이 대표한다.
六必居醬園은 醬菜 가공 기술이 뛰어나고 장사가 잘되어 淸朝 궁정의 주목을 받았다. 조정에서도 이 음식을 원활히 제공받기 위하여 이 장원에 빨간 모자와 노란 조끼를 하사했다. 이 특별한 하사품은 1966년 문화대혁명의 시작과 함께 사라졌다. 신중국 성립 이후, 六必居는 발전을 거듭했으나,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북경宣武區醬菜廠門市部, 紅旗醬菜廠門市部로 개명되었다. 그런데 1972년 일본의 다나까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여 周총리와 담소하다가 북경에 六必居가 있는가를 물어 보았을 때, 周총리가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 다음날 즉각 六必居라는 옛간판을 다시 달게 되었다고 한다.
항저우 똥포어러우(杭州 東坡肉)
항저우 똥포어러우는 후베이(湖北)의 특색있는 요리 중의 하나이다. 쑤똥포어(蘇東坡)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항저우 똥포어러우는 부드러운 육질과 기름지지만 느끼하지 않은 깊은 맛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우리와는 다른 맛, 쟈만터우
지난밤부터 간간이 휘날리던 눈이 하루종일 시나브로 내려 제법 수북히 쌓였다. 오후에 북대 캠퍼스로 눈 구경을 갔다.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해 이왕이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산한 북대 뻬이후 쪽으로 들어갔다. 소롯길에 접어 들면서 집사람과 유학 시절에 이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추억을 더듬었다. 캠퍼스의 반쪽을 느긋하게 걸었는데 이미 6시가 넘었다. 두 시간 가까이 산책하면서 사진도 찍고 눈뭉치도 던져보고 했던 것이다. 가족들이 중국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기에 우리는 일부러 교내에 있는 중국 음식점을 찾아 들어갔다. 평소에 잘 먹던 요리도 시키고, 또 일부러 집사람이 먹고 싶어했던 쟈만터우(炸滿頭)도 시켰다. 아마 중국 음식 중에 이 쟈만터우만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없을 게다.
황소개구리도 먹어요
저녁식사는 중앙민족대학에 있는 장족 학생과 했다. 이 친구는 할머니가 인도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생김새가 일반 장족청년과는 달리 약간 인도 사람 형상을 띠고 있다. 내가 음식을 주문하기로 하고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요리 이름에 무슨무슨牛蛙 라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핏 이게 牛자가 있는걸 보니 소고기 요리인 듯 한데, 소고기를 어떻게 했다는 걸까?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다. 牛뒤의 글자는 개구리 蛙자였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한창 떠들썩했던 "황소개구리"요리가 되지 않는가? 웨이터에게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로 황소개구리를 애기손바닥 만하게 잘라 조리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선뜻 주문하기가 어려웠다. 뭔가 혐오식품을 먹는 듯 했기 때문이다.
오늘 요리는 모두 사천요리였는데, 그 중 웨이터의 조언을 받아 주문한 음식이 가장 맛있었다. 지금까지 중국 사람들이 우리처럼 고기를 쌈 싸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요리는 소고기와 홍당무, 피망 등을 작은 정육면체로 썰어 매운 맛이 나도록 볶은 후 성차이(生菜)라는, 생김새는 양배추인데 훨씬 얇고 연한 야채에 싸먹는 것이었다. 별미였다. 나중에 계산하면서 웨이터에게 요리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웨이터가 써준 요리 이름이 영 엉뚱했다. 내가 메뉴판에서 본 글자와 달랐다. 발음은 같았는데, 글자는 다른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fuqi....였는데, 앞의 fuqi라는 글자를 웨이터는 발음은 같지만 글자는 다른 것을 썼다. 하필이면 "夫妻"라는 글자를 첫머리에 써준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원래 글자가 잘 생각이 안 나니깐 발음은 같고 쓰기 쉬운 "夫妻"라는 단어를 쓴 것이 이채로웠다.
탕수육과 난자완스
중국 요리는 그 이름을 보면 대충 그 요리의 조리 방법과 재료, 혹은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리법은 "난자완스"의 두 번째 글자라든가, "류산슬"의 첫번 째 글자가 이 요리의 조립 방법을 의미한다. 또, 모양은 "난자완스"의 '완스'(사실은 틀린 중국어 발음 표기임), "류산슬"의 '슬'이 나타내고 있다. 사족을 달면, '슬'은 실 사(絲)에 아이 아(兒)자를 붙인 것으로 실처럼 썰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이 아'자는 북경 사람들이 발음상 붙이는 거의 무의미한 조음소 이다.
그렇다고 해서 탕수육이 중국 요리가 아니란 말은 아니다. "탕추러우" 대신에 "탕추리지"가 있다. '리지'는 돼지, 양, 소의 등심부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중국 대륙 사람들은 대부분 소 등심살로 탕수육을 만들어 낸다. 이는 아마도 한국에 있는 화교들이 한국은 중국과 달리 돼지고기가 소고기에 비해 훨씬 싸기 때문에 부드러운 돼지고기를 탕수육 재료로 쓰면서 요리 이름을 바꾼 것 같다. 한국에 있는 화교들은 거의가 산동성 내지는 복건성 출신, 그리고 간혹 광동 출신이다. 그래서 그들이 쓰는 중국어는 표준어가 아닌 관계로 요리 이름이나 발음이 어색한 경우가 많다.
난자완스 요리명의 두 번째 글자는 煎이다. 우리가 "전을 부치다", 혹은 파전, 생선전 할 때의 그 글자이다. 그리고, 원래 정확한 발음은 "자"가 아니라, "지앤"입니다. 이 글자가 뜻하는 조리 방법은 바로 "전을 부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프라이드 에그"를 중국어로 "지앤 지딴"이라고 한다. 지딴은 물론 계란이란 뜻이다.
중국 문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중국 요리에 대해 강의하느라 국내 시중에 나와 있는 중국 요리책들은 다 읽어 보았다. 그런데 아쉬웠던 것은 내가 중국을 드나들면서 먹었던 중국 요리가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바꿔 이야기 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요리는 정통 중국 "요리"에 끼지도 못하는 아주 평범한, 그리고 그것도 몇 가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내 유명 호텔 중국 식당도 마찬가지 이다. 나는 제자들과 중국에 어학 연수를 가는 경우, 의례히 학생들과 중국 음식점을 찾아 간다. 그렇다고 화려하고 비싼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방마다 다른 중국 요리의 특색을 맛보고자 허름한 듯 하지만 간판에 지방 이름을 걸고 하는 그런 집만을 찾아 간다.
양귀비와 리즈
<리즈 나무>
과실수에 소담스럽게 열린 과일은 뭘까요? 살구인가요? 아니지요, 리즈입니다. 양귀비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도 리즈가 제철을 맞아 진상품으로 올라왔다는 말을 들으면 금세 얼굴을 폈다고 합니다. .
중화요리 맛보기
쇠금자가 들어갔으니, 음식의 빛깔이 황금색을 띠겠지요? 재료는 니우러우 라고 했으니 소고기일 것 이구요.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요리 이름에 돈 전 자가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금화와 소고기>, 어째 그다지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재료 중에 파인애플이 들어 있어 새콤한 맛을 내는 것을 보니, 상하이 요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음식에도 상하이 사람들의 공통 속성이랄 수 있는 배금주의가 들어간 것 같네요.
합리적 의미의 배금입니다.
지아 창 떠우 푸는 말 그대로 집에서 늘상 먹는 두부 요리입니다. 재료를 보니 죽순과 팽이 버섯, 그리고 소고기 약간과 두부를 지져서 소스에 버무렸습니다. 우리가 먹는 두부 요리와 다른 맛을 내지요.
<후이 구오어 러우(燴鍋肉)>
취앤 지아 푸 라는 말은 중국어에서 가족사진을 뜻합니다. 아마 식구들이 모여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는 그 밑에 온 집안에 복이 깃들라는 의미로 이 세 글자를 새겨 넣었던 데서 유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요리 이름에도 이것을 차용했습니다. 이 음식을 먹으면서 온 집안에 복이 가득하게 넘치길 바랐던 모양입니다. 요리의 주재료는 해산물입니다. 새우, 해삼, 멍게, 조개, 관자, 대합, 송이버섯, 죽순 등 중국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해산물 위주의 요리이지요. 그러다보니 음식 값도 가장 비싼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 와있는 화교들이 남방 계통이 많기에(산동, 푸지앤, 꽝동 등) 거의 모든 요리에 전분이 들어가 달착지근하면서도 끈적끈적한 소스가 쓰입니다
<깐 펑 시아 럴(乾烹蝦仁)>
중국 요리는 대체로 4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름은 요리 방법과 재료 및 모양새를 담고 있습니다. 이 요리가 대표적이네요. 먼저, 깐 이라는 말을 썼으니, 조리 후의 상태가 물기가 없이 말라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펑 이라는 글자는 조리 방법을 뜻하는 것으로 삶는 방법입니다. 이 말과 관련해서 한 가지 상식을 알아볼까요?우리 정치판에서 흔히 하는 말로, "팽 당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처졌다는 말로, 이용당했다고 느끼는 측에서 자조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전국시대의 항우는 사냥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사냥개도 많이 키웠겠지요. 그런데 눈 오는 겨울에는 사냥감으로 토끼가 최고였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으나 토끼가 보이지 않아 사냥에 실패하자, 자신의 사냥 놀이에 죽어라고 충성했던 사냥개를 삶아 먹었던 모양입니다. 이 상황을 보고 누군가가 "교토사이 주구팽"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다시 이 요리 이름으로 돌아오면, 시아 럴이 뜻하는 것은 깐 새우입니다. 시아가 새우 하 자를 뜻하고, 럴은 런이 얼화된 것입니다. 이 런은 어질 인 자인데, 음식 재료의 속 알맹이를 뜻합니다. 즉, 껍질이나 껍데기를 벗겨낸 상태이지요. 예를 들어 은행 껍데기를 벗겨낸 것을 싱런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시아 럴은 새우 껍질을 벗겨낸 새우 속살이지요. 결국 새우 속살을 살짝 삶아낸 후, 양념을 해 낸 음식이 되는 것이지요.
보통 중화요리는 차가운 것부터 먹습니다. 그래서 요리를 주문할 때 메뉴판에 가장 먼저 적혀있는 것들은 모두 냉채류 입니다. 사실 우리는 차가운 음식에 냉(冷)자를 쓰지만, 중국어로는 이 글자가 차다는 뜻보다 춥다는 뜻으로 많이 쓰이므로, 냉 자 대신에 량 자(凉)를 많이 씁니다. 따라서 우리 음식인 냉면을 중국어로는 량면 이라고 쓰는 것이 더 중국말에 가까울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에 있는 음식점에 갔을 때, 냉면이라고 쓴 집은 거의 조선족이 운영하는 곳이고, 량면이라고 쓴 집은 한족이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그런데 이 요리 이름은 조금 이채로웠습니다. 왜냐하면, 흔히 "삼품"이라고 해서 세 가지 재료를 뜻하는 말로 되어있는데 반해, 이곳은 "삼반"으로 적어 세 가지 재료를 비벼 먹는다는 뜻을 내비쳤기 때문입니다. 해파리와 오향장육과 해삼, 이렇게 세 가지로 만든 전채 요리를 비벼 먹었습니다.
<량 떠우푸(凉豆腐)>
이 날은 날씨가 초여름 같이 더웠던 탓에 모두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식사전에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자 맥주를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장이 서비스로 이 요리를 내왔습니다. 순두부에 양념 간장을 얹은 것으로 맥주 안주로 그만입니다. 시원하거든요. 이 것 아니면, 껍질째 삶은 땅콩을 내놓곤 하지요.
잠실운동장이 생기기전, 서울을 대표하는 운동장은 동대문에 있는 <서울운동장>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전국체전>이라는 종합 경기와 프로야구가 생기기전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전국고교 야구선수권대회>등이 열렸습니다. 한 마디로 일제시대부터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체육 시설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주변에는 상권도 형성되고, 그에 따라 폭력 조직의 한 계보를 형성하는 <동대문사단>도 한 몫 했던 지역입니다. 요즘은 동대문구장이라는 격하된 이름으로 불리고 주변에는 두타, 혹은 밀리오레 등의 초대형 청소년 대상 의류복합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서설이 길어지나요? 그런 뒷골목 조직들의 연원을 더듬다보면 일제 시대로 훑어 올라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삐루"가 생각나는 "삐야호루(Beer Hall)"나, "빼갈"이 떠오르는 "짱께(掌櫃的)"집이 생각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즉, 동대문과 중국음식점을 엮으면, 운동장 건너편의 밀리오레 골목 초입에 있는 "東華飯店"이 생각납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산동출신 화교분이 주인인 중화요리점이지요. 이 음식점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지만, 사진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요리 한 가지로 수 십 년 간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 요리는 "빠바오완즈"라고 합니다. 이름을 풀어보면, 여덟 개의 좋은 재료를 썼고, 모양은 개똥벌레의 경단 같은 공 모양 이지요. 크기는 이 음식점 벽에 써 붙였다시피, 햄버거 6개 크기입니다. 다른 곳에는 없는 메뉴인데 주인장이 개발했다고 합니다. 이 요리는 두 가지 점에서 이채롭습니다. 하나는, 그 껍질(?)입니다. 사진은 일부러 완즈의 한 쪽을 숟가락으로 헤쳐 놓은 모습인데, 원래는 원형으로 식탁에 올라옵니다. 척 보면, 꼭 누룽지 같아 보입니다. 기실 맛도 누룽지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돼지고기를 갈아 다진 후 팬에 구운 것입니다. 둘째로, 소스 맛이 남다릅니다. 완즈 속의 음식 맛은 다른 음식점의 팔보채라든가 취앤지아푸와 비슷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재료가 해산물 위주로 구성되었거든요. 그런데. 그것들과 달리 이 요리는 굴소스를 쓰지 않고 대파 소스를 씁니다. 그래서 안쪽의 해산물을 먹을 때 완즈 바깥에 뿌려 놓은 걸죽한 소스를 비벼 먹어야 합니다. 그 소스가 단순히 젤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대파와 섞인 야채가 맛을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오늘 점심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맛보여 주려고 오랜만에 이 음식점을 찾았던 것인데, 아이들도 모두 맛있게 먹더군요. 어른 두 세 명이 가서 바이지우 한 병 하면서 먹으면 안주로도 좋고, 요깃감으로도 좋습니다.
중국요리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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